
수상작인 정소현 작가의 '그때 그 마음', 자선작 '어제의 일들' 두 작품 모두 너무 쓸쓸하고 슬픈 이야기였다. 이렇게까지 밀어붙이다니, 작가님에게 근래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반드시 슬퍼하고야 말겠다거나, 필사코 우울해져버려야만 겠다거나... 그런 마음을 먹을 정도의 어떤 일을... T^T
그래도 이 작품들은 현재의 반영이려니, 지금 이 시대의 공기를 작가님이 그렇게 느끼셔서 이렇게까지 적으신 거라 이해했다. 실제 그렇게 이해하면 또 이렇게 잘 요즘을 포착한 이야기도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김멜라의 '저녁놀'은 재밌다. 나는 이야기에 대한 설명 중 '재밌다'는 말보다 더 좋은 단어를 모른다. 알아도 일단 여기서는 모른다. 그러므로 저녁놀은 재밌다. 역시 무척 재밌는 이야기인 박민규의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와 비교해서 읽으면 확실히 더 즐겁게 작품을 즐길 수 있다. 시대가 이렇게 변했구나... 또 변해가는구나...
손보미 작가의 '해변의 피크닉'은... 이상문학상의 불장난을 읽은 후라 초반 몇 페이지를 읽다 말았다. 같은 이야긴가, 하는 기시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심사평에서 근래 손보미 작가가 소녀를 화자로 하는 연작 형태의 글을 발표한다는 걸 알았는데, 그래서 다시 읽을까 하다가 결국 안 읽었다. 나중에 읽어야지, 하면서, 또 좋은 작가이니 나 같은 불량 독자 하나 있다고 한들, 하며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쩌란 말이냐, 나는 이 정도 수준의 독자란 말이다. 더 훌륭하고 위대한 독자가 될 계획은 당분간 없다. 바쁘단 말이닷! T^T
안보윤의 '밤은 내가 가질게'는 원고지 120매 가량의 조금 긴 단편이다. 내가 이 작품의 원고지 매수를 대충이나마 가늠하는 건, 그렇다. 이 작품도 필사했기 때문이다. 노트북의 워드로 한 것이지만. 아무튼 내가 그렇게 했다는 건 여러 작품이 실린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재밌게, 또 의미 있게 읽었다는 얘기이고, 실제로도 아주 좋았다.
다만, 이건 '저녁놀'도 좋았기 때문인데, 근래의 읽게 되는 많은 연인 관계가 동성으로 나온다는 걸 필사를 하며 새삼 느끼게 됐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느껴지는 감정이나 상황, 또 상태 등이 동성이라고 이성과 달리 유별나게 특이하거나 다를 거 같지는 않다. 그래서 크게 상관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얼마 전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마크 릴라의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는 책을 추천 받아 읽기 시작하는 중이라 그냥 그렇게 보여지지가 않는다.
'정체성 정치를 넘어'는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라는 책의 부제다. 만약 요즘 작가들이 연인 관계의 이야기를 씀에 있어 동성애 관계를 주로 쓰는 게 정체성에 기댄 글쓰기라도 나는 작가라면 결국 동성애자만이 아니라 하려는 이야기가 인간 전체에 가 닿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또 동성애 관계가 작금의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전략이라고 판단해 한 선택이라면, 너무 많은 작가들이 너무 비슷한 생각으로 너무 유사한 선택적 결과물을 내놓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둘 중 뭐라도, 아니 그 중 아무 것도 아니라도 지금 나타나는 이런 편중 현상이 나는 아쉽다고 생각된다.
정체성이라면 언젠가는 그걸 넘어서야 할 테고, 전략이라면 더 공부해야 할 테다. 물론 그 전에 글을 쓰는 것만으로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어야 할 거 같기도 하고, 이 책에서 본 글이 그렇다는 건 아닌데, 너무 많다는 건 확실히 이런 경계심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이 소설집에서 제일 좋았던 건 '밤은 내가 가질게'였다.
위수정의 '풍경과 사랑', 이장욱의 '노보 아모르', 임솔아의 '초파리 돌보기'도 흥미롭다. 위수정 > 이장욱 > 임솔아 작품 순으로 재미있게 읽혔지만 그건 내 수준일 뿐, 자타공인 내 수준은 동네 아재다. 그 수준에서는 다 좋았다.
정지돈의 '지금은 영웅이 행동할 시간이다'와 조해진의 '허공의 셔틀콕'은 필사를 해야겠다, 라고 생각한 작품들이다. 재밌는데 내 눈에 의미까지 있어 보이는 그런 작품들 말이다. 다만 필사를 하지 못한 건 이걸 읽을 때쯤 더럽게 바빴기 때문이었다. 워드로 이 작품을 포획해 언제 어디서라도 두고두고 꺼내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는데 현실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럼, 조금은 덜 바빠진 지금은? 바빴다니까, 그정도로 바빴으면 좀 쉬자. T^T
한정현의 쿄코와 쿄지는 읽지 않았다. 3분의 1쯤 읽었는데, 현실의 피로에 나는 쉽사리 내 무릎을 내줬다. 꿇으라면 꿇겠어요, 였다. 그리고 아마 이 작품이 소설집 중반쯤에만 나왔어도 다 읽기는 했을 텐데, 앞서 언급했듯 너무 많다. 이런 소재를 가지고 쓴 작품들이. 피로가 내 눈길을 잡아둔 채 멈췄다면 반복된 소재가 내 손을 묶었다. 단, 오가는 버스 안에서 읽은 그 3분의 1은 분명 재미를 느꼈었다. 오늘 이 글을 올린 후 언젠가 그 오가는 버스 안에서 이 글을 다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까지는 그렇지 못했다. 안 그래도 되는데 일단은 솔직하게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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