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고

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살아남자 2026. 1. 24. 14:04

 

 

목차

  • 홈 파티 007
    숲속 작은 집 045
    좋은 이웃 097
    이물감 143
    레몬케이크 189
    안녕이라 그랬어 217
    빗방울처럼 257

 

 

홈 파티

 

... 더불어 그 집에는 그런 개성뿐 아니라 '서사적 윤기'라 부를 만한 것이 곳곳에 포진돼 있었다. 한쪽 바닥에 무심하게 놓인 현대 회화 액자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온 걸로 추측되는 나무 조각품들, 은은하게 색이 바랜 진짜 아라비아산 카펫까지...... 오대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연은 물건 하나하나에 깃든 집주인의 시간과 체력, 미감과 여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p15)

 

... 지난 세월, 시간의 물살에 깎이고 깨지며 둥글어진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이십여 년간 이연이 여러 인물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깨달은 사실은 단순했다. 그건 '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해와 갈등이, 드라마가 생겼다. 최근 들어 배역 스펙트럼이 점점 좁아짐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배우로서 지금 제 나이와 제 경험이 싫지 않았따. 적어도 지금 이연은 인간을 더 연민하게 됐으니까. 이연은 그리스신화 속 영웅이나 현대의 범인 못지않게 '그 나머지' 사람들을 애정하게 되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을,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자들을, 변명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약한 이들을 깊이 응시하게 되었다. 우선 이연부터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연은 착한 사람보다 성숙한 사람에게 더 끌렸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 (p24)

 

... 만약 뭔가 얘기할 거라면 아주 말짱해야 한다고. 그래서 아까부터 술을 더 입에 대고 싶은 욕구를 거의 초인적인 힘으로 꾹 참고 있었따. 살면서 어떤 긴장은 이겨내야만 하고, 어떤 연기는 꼭 끝까지 무사히 마친 뒤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걸, 그건 세상의 인정이나 사랑과 상관없는, 가식이나 예의와도 무관한, 말그래도 실존의 영역임을 알았다. 처음 여기 왔을 때만 해도 임원 연기를 위해 '최대한 저 사람들처럼 생각하자, 저 사람들 입장에서 느끼고 즐기자' 다짐했는데,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 되는 게 있었서였다. (p40)

 

순간 몇몇 이들이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연은 자신이 뭔가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걸 수습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p40)

 

오대표의 목소리를 듣자 이연의 머릿속에 문득 학교에서 배운 서사 이론 하나가 떠올랐다. '작가로서 당신이 누군가에게 뭔가 뺏고 싶다면 그에게 먼저 그걸 주어라'라는 법칙이었다. 그래서 이연은 지금도 소설이나 연극,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면, 사랑이나 어떤 성취 혹은 며예 앞에서 너무 벅찬 감정을 표할 때면 어김없이 '저 사람 곧 저걸 잃어버리겠구나' 예감하곤 했다. (p41)

 

- 한 공간에서 고작 몇 시간 정도를 묘사하는 걸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된다는 것,

- 겨우 여섯 명의 인물로 이 짧은 이야기 안에서 이만한 긴장을 만들어내는 것

- 인물들이 가지는 고저의 차이로 이야기가 직조시키는 능력, 은 부럽다. 더 럽하기도 하고.

 

 

 

숲속 작은 집

 

- 처음 읽은 게 5년은 더 된 거 같은데, 하고 확인하니 2019년 작품이었다. 홈 파티도 처음 읽은 게 이삼 년은 된 거 같았는데, 음...

  더 열심히 더 많이 쓰시라, 채찍을 휘두를 수도 당근을 드릴 수도 없는 상황인 게 아습 ;;;;

- 사실과는 무관하게 내 멋대로 해버린 판단들, 그 판단을 기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되어

  내 안에서 반쯤 죽었다 다시 살았다 고문을 당했다 부귀를 누리다 그랬던가...

  이미 많이 그랬음에도 아직 그러고 있다는 걸 새삼 일깨워주니, 다시 판단하지 말자, 내 멋대로 판단하지 말자 되된다.

- 고마움은 참 서글프기도 한 감정이다. 엄마 ㅜㅜ

 

 

 

좋은 이웃

 

... 얼마 전 남편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우리도 이제 미니멀리스트로 살자' 했다. 나는 그 말이 '선택'이 아니라 '포기'처럼 느껴져 불편했지만, 남편이 결혼 후 지난 십 년간 모은 브랜드별 맥주잔을 동네 중고 마켓에 통째로 내놓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게 또 너무 헐값에 팔리는 걸 보고도. 우리는 이사 전 거실을 가득 채운 책장도 미리 정리하기로 했다. 유산 후 원래 다니던 학습지회사를 그만두고 독서지도사로 오 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집에 책이 늘었다. 그중 우리는 시의성이 떨어지거나 너무 낡은 책, 어쩌다 두 권 생긴 책, 당시에는 좋았지만 더는 안 볼 것 같은 책 들을 처분하기로 했다. 평소라면 어디 기부했을 텐데, 집값 폭등 후 갑자기 마음이 안색해진 남편은 '한푼이라도 이껴야 한다'며 중고 서점에 내놓을 책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 (p103~104)

 

... 재활용품 수거함이 한데 모인 어둑한 장소로 걸어가며 두 달 전 집주인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만일 그 전화가 아니었다면, 아니 그보다 일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전염병이 아니었다면, 그사이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지 않고, 노동 가치니 화폐가치니 하는 것들이 이렇게 떨어지지 않았다면, 나도 저 윗집 부부처럼 밝은 얼굴로 이웃을 환대할 수 있었을까? 하고. (p105~106)

 

- 부동산이 올라 행복한 이들에게, 사후 그들의 영혼이 누워 쉴 곳은 한 평이 채 되지 않기를... 기도!

-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선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나이지리아의 속담에 빗대, 좋은 이웃을 가지기 위해서도 온 마을이, 사실은 온 세계가 다 동원되어야 한다. 이 말은 또 당연히 이런 뜻이다. 행복해하는 아이와 좋은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서는 전 세계가 필요하다. 혼자 행복해하는 방법 따위는 없으니 더불어 산다는 게 뭔지, 공동체라는 게 뭔지 그 생각을 놓치고 사는 사람은 결국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근데 현실은 참... 싫으네...

- 이 글이 아프게 읽히는 사람이 많기를... 아픈 만큼 성장하기를... 젭알!

 

 

 

이물감

 

- 제목 때문인지 읽으려 할 때 김기태 작가가 떠올랐다. 근데 어랏, 화자가 기태다. ;;;

  읽으면서는 김기태 작가 생각이 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싶었다. 하지만 끝까지 읽으니 꽤나 비슷한 경로를 통해 영 엉뚱한 행성에 도착하게 되는 떠돌이 비행물체가 생각났다.

- "... 박과장이 과장되게 웃었다."(p159)를 읽으면서는 " 인간들은 회의(會議) 한다. 회의(懷疑)가 사라질 때까지."(p222p라 쓴 박민규 작가가 생각났다. 이렇게 하나의 작가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에서는 작가 세계 전체가 필요한 법이다. ㅎㅎ

- 나도 언젠가 이런 문장을 쓴 적이있다. "회의(會議)는 회의(懷疑)가 들때까지 계속되었다."인가... 정확하게 뭐라 썼는지 기억이 ;;;;

- 그래서 희주는... 안 보여주니 쓸쓸해진다. 내가 아니라 그녀가.

 

 

 

레몬케이크

 

... 선주는 '아직까지는 괜찮아' '더 버틸 수 있어'라는 암시로 일상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선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중요한 문제를 계쏙 모른 체하고 있다는 걸. 너무 무겁고 괴로운 문제라 최대한 그 답을 미루고 있음을. ... (p195)

 

... 기진은 놀랐고, 부모 자식 간이라도 '몸'과 '몸'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 실감했다. (p206)

 

... 선주가 한번 더 '이럴 때 딸이 있어 참 좋다'고 했다. 선주는 자신이 딸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늘 걱정하면서도 가끔은 딸에게 의존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방법'이 없으니까. 주위에 물어볼 곳도, 수단도, 자원도, 지식도 없으니까. (p207)

 

... '인생은 즐거운 것이 아니다'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기쁘다'라는 문장이 자연스레 양립하는 데 놀랐다. 엄마가 한 손에 그 두 가지 답을 다 갖고 있다는 데. 동시에 '나는 매일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는데 부모님은 어떻게 맨정신으로 삶을 견디는지, 어떻게 그렇게 조금도 취하지 않고 하루를 견디는지' 궁금했다. 그러자 기진의 머릿속에 '어쩌면 엄마는 엄마대로 오늘 서울로 여행을 온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나도 즐겁지 않지만, 공포감을 안도감으로 바꿔 줄 어떤 여행을. 그리고 그 여행을 위해 집에서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골라 입고 새벽부터 올라왔을 거'라고. 동시에 어린 시절 자신이 아플 때 만사를 제쳐두고 자신을 업은 채 사방팔방 뛰어다닌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몹시 술 생각이 났다. (p213)

 

- 울 엄마 복권 당첨되게 해주세요!

  ... 소원은 이뤄지고 그렇게 선주의 또 다른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두둥!

 

 

 

안녕이라 그랬어

 

이렇다 할 기술도 자격증도 없는 상태에서 막연히 품은 회망이었다. 나는 정작 가장 중요한 이유인 '외국어 공부를 하다보면 아직 내게 어떤 가능성과 기회가 남은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엄마를 납골당에 모시고 한 달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p226)

 

... '저 남자, 날 감상하고 있어'란 자각이 들어서였다. 로버트는 욕망을 드러내기보다 감추는 편에 속했는데도 그런 감정이 전해졌다. 동시에 '오랜만이다'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눈동자에 담긴 호감과 호기심 그리고 성적 긴장을 마주하는 것은. 그런데 그게 전혀 느끼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외로워서 그런가?' 스스로를 의심했다. 현수와 헤어진 뒤 누군가와 정신적으로도 또 육체적으로도 진지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나는 내 감정이 인간적인 호감인지, 성적 주체가 되는 기쁨인지, 성적 대상이 되는 설렘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그 모든 게 섞인 총체적인 무엇일지 몰랐다. 감정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 (p233)

 

... 이제 와 헌수 말을 빌리자면,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저 내 차례가 된 것 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앞에서 매번 깜작 놀라는 표정을 지을까? 마치 살면서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p250)

 

병실에서 혹은 쇠락한 고향 골목에서 홀로 어둠과 마주하며 나는 종종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미 많은 걸 잃었다 여겼는데 여전히 잃을 게 남은 삶 속에서, 자꾸자꾸 잃는 과정에서, 물수건으로 엄마 뒤를 닦고 엄마 눈을 본 뒤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었던 때, 그러나 그러 수 없었던 때, 그러지 못했거나 거의 그럴 뻔했던 때를 떠올렸다. 어려서부터 가족 간병을 경험한 헌수는 어쩌면 그게 뭔지 너무 잘 알아서, 그걸 다시 겪을 엄두가 안 나서 나를 떠난 걸까?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내 쪽에서 먼저 정중하게 도망친 거였지. 물론 칼같은 이별은 아니었고 그뒤 몇 번의 재회, 몇 번의 잠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먼저 안녕이라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우리가  이제 다시는 못 볼 사이가 됐다는 걸 알았다. ... (p251)

 

- 글을 읽을 때 마치 나 같은 인물을 보거나, 마치 내가 바라던 나 같은 인물을 보거나, 마치 내가 바라지 않는 상황에 처한 인물을 보거나 할 때, 마치 살면서 한 번도 나를 모랐던 거처럼, 그런 사람이기를 바란 적 없었던 거처럼, 매번 그런 상황을 피해다니며 안도했었던 사람처럼 깜짝 놀라고는 한다. 다르지만 비슷하고, 비슷하지만 다를 수밖에 없는 은미를 보며 마음이 스산해진다.

- 지금도 이야기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그 이야기에 접속한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부디 그 안의 모든 부정적인 생각 감정 기억 그 모든 것들의 안녕을 빌며 무사히 잘 고이 떠나갈 수 있도록 장례를 치뤄주는 일.

  가끔 거기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안 받을 때가 있다. ..."안녕"이라고, 부디 평안하라고. 빌어주는 마음 앞에서 더욱 그렇다.

- 문장에 쉽게 마침표를 주지 않고, 쉼표로, 거듭 쉼표를 말을 이어가는 게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서도 본 거 같은데, 기억이 ;;;;

  아무튼 그런 게, 그런 시도? 방식? 양식? 그래서 전달하는 느낌? 감정? 생각? 같은 게 좋았다.

 

 

 

빗방울처럼

 

- 현실의 어떤 일들을 재현한 소설은 참 읽기가 힘들다. 이런 유의 글들이 그렇다. 툭툭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어디서든 그런 소리는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소리를 들으면 꼭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서 "안 된다고, 그러지 말라고. 부디 살라고" 하는 소리인 줄 알아달라는 작가의 바람이 현실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ㅜㅜ

- 어디 인터뷰에서 본 거 같은데, 이 작품집에도 유난히 많이 모국과 이국의 언어가 나오는데, 인터뷰는 기억이 안 나고 언어에 대한 무슨 말을 했었다는 기억만 무슨 화석처럼 흔적만 남아 있는데, 아무튼 이번 단편집에서 읽은 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