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고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살아남자 2026. 2. 14. 14:42

 

 

       목차

  • 최은미 김춘영
    작가노트 | 박정윤
    리뷰 | 최윤 인간이 드러나는 기이한 통로들

    강화길 거푸집의 형태
    작가노트 | 숙면의 시간
    리뷰 | 강지희 고통과 허기로 조형한 거푸집의 빛

    김인숙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작가노트 | 공간과 우주
    리뷰 | 구효서 망측罔測-헤아릴 수 없음

    김혜진 빈티지 엽서
    작가노트 | 삶을 탐구하는 작업
    리뷰 | 조경란 해석과 설명

    배수아 눈먼 탐정
    작가노트 | 엠마오로 가는 길
    리뷰 | 김미정 홀연 반짝이는 순간, 에 대한 메모

    최진영 돌아오는 밤
    작가노트 | 그리고 다시 시작해
    리뷰 | 김화영 주어主語의 귀환을 위한 모험

    황정은 문제없는, 하루
    작가노트 | 후기後記
    리뷰 | 소영현 부정적인 것과 함께 살아가기

 

 

 

 

 

김춘영, 최은미

 

...

"아무래도 멧돼지였던 것 같습니다."

제설 얘기를 하던 중에 안경을 쓴 군인이 말했다. 그들은 도롱이 연못 터에서 무언가를 보았다고 했다. 눈이 오고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뭔가 살아 있는 것이 움직였던 것 같다고 했다.

"멧돼지보단 노루나 고라니 쪽 같기도 했습니다."

이번엔 키가 큰 군인이 말했다.

얘기를 듣던 남자가 한숨을 쉬듯 웃더니 군인들을 향해 말했다.

"이 장병들 큰일나겠네."

"......"

"정체가 뭔지 확인을 안 했단 말입니까?"

그때까지도 나는 김춘영이 나와 같은 전기장판 위에 앉아서 숨을 돌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맷자락이나 휴짓조각으로 좌탁을 문지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여자는 피곤한지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온풍기가 회전하면서 되쏘는 빛이 통창에서 이쪽으로 계속 건너오고 있었다.

"군인한테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남자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말해보세요. 군인한테 첫번째가 뭡니까?"

남자가 재차 묻자 군인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피아 식별을 못하면 군인은 끝인 겁니다."

"......"

"군인한텐 첫째도 둘째도 이거예요. 피. 아. 식. 별."

김춘영이 내 팔을 잡은 건 그때였을 것이다. 통창에 비친 김춘영의 모습을 보게 된 것도 그때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남자가 던진 피아 식별의 그물에 순간적으로 갇힌 채 통창에 반사된 서로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김춘영을 급히 부축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 동료가 아니면 적밖에 없는 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처럼 단출한 세계관.

  그런 세계에 신록의 푸르름이 있을 리 없고, 같은 잣대로 사람을 발가벗긴 채 길바닥으로 내동댕이 치며 이렇게 고함 지르겠지.

  네 정체가 뭐야! 적이야 동료야! 간자야 아니야! 너이씨, 빨갱이지?

  모두가 모두에게 너도 한 순간에 그 꼴이 될 수 있다며 눈을 부라리던 시대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아니 간신히 흘러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그런 앙상한 세계가 너무 좋다는 사람들이 40퍼센트쯤 있다.

  곤란하다. 곤란하지만 일단은 화이부동(和而不同).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거 같다. 다르지만 어떻게 화평하게 같이 할 것인지는 각자가 고민할 몫.

  나는 고 홍세화 선생님이 일러준 말씀, 앵톨레랑스에 대한 단호한 앵톨레랑스, 가 그나마 가장 좋은 방법 같다.

  사람 같지 않은 것들은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게 좋다.

 

 

 

거푸집의 형태, 강화길

 

- 재밌다. 재밌는데, 좀 섬뜩한 부분이 있다.

  작가 노트를 읽으니, 아으음... 하게 됐다.

  아무튼 인간이라는 게 일단은 그따위라는 데 동의하는 편이라, 나라고 안 그런가 돌아본다.

  그러니... 어, 안 그런데,한다. ;;;

  하지만 거푸집은 맞는 거 같다. 나는 내 엄마와 많이 닮았다. 이런저런 정보들을 긁어모으며 혼자 어렴풋하게 그렇겠지,

  생각하고 살다 매일 대화를 나눠보니 실제가 그렇다. 그래서 가족이란... 참 끊이지 않는 문학의 소재가 맞다.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김인숙

 

- 오래된, 오래된 무늬라고 하면 이상할까? 하지만 그런 무늬를 가진 나무 탁자가 생각났다.

  휑그러니 별 거 없는 공간에 그 탁자 하나가 덩그러니 있다. 근데... 그 탁자가 가진 무늬가... 슬프다.

  슬픈데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라, 그렇다가 안 슬픈 것도 아니라, 애달프다 느낀다.

  사는 게 그런 거지, 싶다가 또 사는 게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싶으면서 사는 거고, 아닌가 하면서도 사는 거고...

  "애초에 죽을 마음은 없었의까. 죽고 싶기는 하지만 정말 죽을 생각인 건 아니니까. 죽을까라고 생각한 후에는 항상 살까라고 생각    했으니까." (p143~144)

 

 

빈티지 엽서, 김혜진

 

 

눈먼 탐정, 배수아

 

"또한 불행한 사건이나 죽음은 반드시 살인사건이 아니라도 일어나며, 신기하게도 악의나 부주의와는 무관해 보이는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기도 한다는 느낌을 그는 받았다고 했다. 즉 갑작스러운 혹은 갑작스러워 보이는 불행은, 다른 종류의 불행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사실상 매일매일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흰 두부처럼 잘린 그것을 임의로 한 조각씩 나누어 가질 뿐이다.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p198)

 

- 그래서 삶은 두부를 먹는다. 오늘은 두부다. 저녁 확정!

 

 

돌아오는 밤, 최진영

 

"숱한 시도 끝에 한 회사에서 면접까지 통과했다. 일 년 계약직이었고 십 개월 연장 계약이 가능하다는 조건이었따. 일 년이라도 일을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사수가 나를 싫어했다. 어차파 나갈 사람, 그렇게 말하면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동료들에게는 신입이 할 줄 아는 게 없어 자기 일만 쌓인다고 불평했다. 어차피 나갈 사람을 덜컥 뽑은 회사도 문제고 일 년짜리 계약직이나마 하겠다는 생각 없는 신입도 문제여서 결국 자기만 죽어난다고 불만이 많았던 그는 무기 계약직이었다. 그는 정규직과 자기의 처우 차이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와 자기의 처우에 별 차이가 없는 것은 역차별이라고 했다. 그에게 나는 어떻게든 회사에 불붙어서 월급을 타먹으려고 발버둥치는 거지같은 존재였다. 너는 그래서 문제야. 너는 그래서 안 돼.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 말을 매일 들었고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아, 이 사람은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구나. 그래서 나를 싫어하는구나. 나를 보면 뭔가 달라진 것만 같으니까. 일 년 십 개월을 버텼다. 회사에서는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경력을 만들었다. 그 경력이 이직에 도움이 되었다. 두번째 직장의 사수는 종종 물었다. 이전 회사에서 도대체 뭘 배운 거야?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배척하고 싫어할 수 있는지를 배웠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런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 또한 배웠기 때문이었다. 두번째 직장에서는 이 년을 버텼다. 조금씩 레벨 업된다고 느꼈다. 그리고 지금 회사로 이직했다. 여전히 레벨 업중이다. 오직 이향기만이 내가 어떻게 버텨왔는지 안다. 시시콜콜 아는 건 아니지만, 힘든 시절 나를 뒤덮고 있던 경멸과 혐오의 분위기를 안다. 울면서 전화하면 향기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내가 들은 말을 다시 내 입으로 내뱉기도 싫었다. 그랬다가는 입이 썩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저 소리 내어 울었고 향기는 들었다. 한번은 전화를 끊은 뒤 향기가 피자 기프티콘을 보내준 적이 있었다. 나는 마음이 잔뜩 꼬인 채로 기프티콘을 거절하고 답장을 썼다.

왜? 내가 불쌍해?

집에 가서 뭐라도 먹으라고.

이런 상황에 뭘 먹어? 내가 돼지야?

향기가 건넨 꽃을 나는 뱀으로 받았다. ..." (p 248~250)

 

- 이야기가 그렇게 튈 줄은... 예상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만큼 그 흉측한 녹슨 대검 같은 게 푹! 하고 사람을 찔러온다.

  되게 읽기 싫을 정도로 싫은데, 12.3이 워낙 잣같은 이야기라 그날의 더러운 기분까지 같이 소환되어 온다. 어우 싫어...

  작가님, 나쁜 짓이나 범죄자 하셔도 꽤 잘하실 듯 ;;;;

 

 

 

문제없는 하루, 황정은

 

"나중에 영인은 그 순간을 여러 번 곱씹었다. 영인은 이미 넘어갔다고 생각했고 인범은 넘어가지 못한, 바로 그 순간을. 인범은 좀전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고 믿었고 영인은 그걸 끝내고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다가 동시에 그걸 깨닫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영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

요즘, 하고 말한 뒤 인범은 큼, 목을 가다듬었다. 말을 꺼내는 게 버거운 것처럼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쉰 뒤 영인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영인은 놀라 눈을 깜빡이며 인범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인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가 그대로 말랐다.

요즘 사람들과 말을 나누는 것이 어렵다고 인범은 말했다.

나한테 정말 중요한 일들이 있어. 내가 생각하기엔 사람들에게도 정말 중요한 일들이거든. 그래서 나는 자꾸 그걸 말하는데, 말하면 시답잖은 일이 돼.

시답잖아져, 말하면서.

말하면, 내가 그걸 말하면, 사람들은 그 진부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왜 여태 하느냐는 얼굴로 나를 봐.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 그 이야기가 왜 나와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곤란하고 안쓰럽다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면서 나를 봐. 그러면 나는 사람들이 그 일을 얼마나 신경쓰지 않는지를 알게 돼. 그게 그 사람들에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돼. 내게 너무, 너무 중요한 그 일들이, 사람들한텐 중요하지 않아.

그걸 보게 돼.

그게 어떻게 나를 죽이고 있는지, 언니는 몰라." (p292~293)

 

"...  영인은 그의 분노를 이해했다. 그리고 방금 지난간 찰나를 이해했다. 그 짧은 순간에 몇 번이고 이어지는 충돌을 영인은 보았고 사고로 뒤죽박죽된 몸들을 보았다. 먼저 영인, 그다음 인범과 노인, 다가오는 운전자, 그다음 사람을, 그 연쇄를. 그들 모두가 찰나에 그 가능에서 다른 가능으로, 그 순간이 아닌 다른 순간으로 넘어왔다는 걸 영인은 이해했다. 하지만 다음엔 어떨까.

내가 울고 있나.

영인은 생각했다. 내가 믿고 있나. 지금 지나간 사람과 이다음에 오는 사람을 내가 믿고 있나. 그가 멈출 거라고, 속도를 줄일 거라고 나는 믿고 있나. 영인은 그렇다고 답하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이만큼 두려운 거라고 생각했다. 인범은 노인의 얼굴을 차분하게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마랗고 있었고 노인은 운전석 바깥으로 두 발을 내놓은 채 인범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손을 잡은 인범의 손에도 피가 묻었다.

영인은 풀뚝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인범의 차 가까이로 다가갔다.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쩔 수가. 이런 마음으로 무언가를 일으키거나, 일으키지 않을 수 있을까. 영인은 운전석 문을 열고 팔을 뻗어 경적을 울렸따. 사람, 있어, 사람, 인범이 이쪽을 흘긋 돌아보았다." (p314~315)

 

- 참 어려운 문제다. 누구나 마주 설 문제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제 없이 무식하고 넘어가는 문제. 그래서 더 문제인 문제. 이 문제 앞에서는 그야말로 전 인류가 타인이라는 거울 앞에서 선 짐승들이다. 그래서 또 문제다. 모두 그러하므로 문제이지만 모두 그러하기에 그 문제를 문제삼아 물고늘어지기가 너무 어렵다. 그 모두에 늘, 나무 자주 포섭되지 안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그래서 문제다.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