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수면 위로 - 김연수 · 049
자장가 - 윤성희 · 095
웨더링 - 은희경 · 129
초록 스웨터 - 편혜영 · 167
인터뷰
고요와 소란 사이에서, 음악과 이야기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작가와 편집자가 함께한 인터뷰 · 199
- 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 수면 위로, 김연수
처음 그는 여행의 목적이 죽음을 이해하는 것에 있음을 암시하는데, 시작부터 두 대의 카메라로 자신과 주변을 촬영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자막에 나오는바, '희망이나 낙관 같은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 '죽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 때는 그걸 피하지 않음으로써 거짓과 기만에 기대 살아가는 역겨운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는 것. (p56)
기진은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우리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삼십 대 후반에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젊은 시절에 비해 열정이 줄어든 만큼 각자의 사적인 부분을 존중했다. 특히 각자의 과거, 그중에서도 연애사에 대해서만은 금단의 영역으로 여겼다. 물론 기진의 지난날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건 묘한 것이라 그의 삶에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마저도 나는 현재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둘이 처음으로 같이 간 여행지에서 그가 익숙하다는 듯 낯선 골목으로 서슴없이 걸어갈 때면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찾아간, 대개 현지인만 안다는 숨은 맛집에서 음식을 먹노라면 나 이전에 그와 함께 여기에 왔을 그 미지의 사람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불필요하다고 심지어 관계에 균열을 가져올 게 분명한 호기심을 해결하고 싶은 욕망이 전혀 없었다. 그건 나이 듦이 주는 축복이었다. 이따금 궁금증을 일으키는 그런 일들만 아니라면 우리의 관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우리 둘뿐이었다. 둘 다 제도적 관계에는 관심이 없었고, 혼자 살아온 삶을 바꾸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우리의 관계를 알리지 않았다. 가끔 기진이 우리 집에 오거나 내가 기진의 집에 가서 며칠씩 함께 지내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전혀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의 삶을 혈연들이나 가질 수 있는 유대감으로 연결시키는 일에 우리는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나는 아교 역할을 하는 그런 끈끈한 감정이 없이도 유지되는 우리의 관계에 자부심을 느꼈다. 고통으로 가득찬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명의 동료 인간으로서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를 깊이 사랑했고, 그 관계에 만족했다. (p60~61)
몇 번이고 이 동영상을 되돌려보고 나서야 저는 알아차렸습니다.
이분의 말은 바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을.
어떤 시간여행자가 과거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면, 거기에 자신이 놓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물이 날 정도로 인생이 뻔하고 지긋지긋하다면,
같은 하루를 몇 번이고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우리는 뭘 해야만 할까요?
"찾기 위해서죠. 지금 이 순간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지금 여기에서 그걸 찾아야 해요. 그게 내가 기시감, 신맛, 자살 충동을 느끼는 이유에 대한 나의 가설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몇 번이나 이 하루를 다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시간여행자일지도 모르죠.
지금 여기에 우리가 놓친 뭔가가 있습니다.
이게 제가 이 여행에서 배운 두 번째 가르침입니다.
(p79~80)
한 달 정도가 지난 뒤에야 나는 내가 쓴 것들을 다시 읽을 수 있었다. 쓸 대는 이애할 수 없었던 것들, 부끄러웠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자 새로운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일어난 일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사이에 그 일을 바로보는 나의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노트의 여백에다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적었다. 그러면서 진실을 쓰는 일이 왜 중요한지 알게 됐다. 진실되게 쓴 문장들만 새로운 의미를 얻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 썼던 내용을 여러 번 다시 쓰기도 했다. 그건 일기가 아니었으니까. 예를 들어 기진과 내가 처음 만난 날에 대해 나는 여러 번 다시 썼다. 쓸 때마다 이야기는 조금씩 달라졌다. 그때는 그 만남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 확실하게 알게 됐다. (p81~82)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나는 행복하고 슬프지 않다. 나는 해복하지 않고 슬프다. 나는 행복하고 슬프다. 나는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이 모두를 말해야지 인생에 대해 제대로 말하는 게 아닐까? (p90)
어려서 세상이란 너무나 분명한 무엇이었다. 맞으면 아팠고 아프면 울었다.
세상에도 삶에도 나를 폭행하기 위한 무수한 폭력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것들은 사양하거나 거르는 법 없이 달려들어 나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공간적으로 가정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일터에서 다시 집으로, 그 사이를 오가는 인도에서 버스 안에서.
관계로는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가족도 친구도 지인도 타인도 나도 너도.
너무나 선명한 세계여서 나는 답이 있으리라 여겼다. 이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난 하나의 분명한 정답이.
그렇게 오래 활자와 관계와 공간들을 떠돌며 알게 된 것이 하나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 확실하다는 것이다.
나는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의 세계로 진입했다.
세계와 얽힌 채 여러 관계에 중첩된 채 존재하며 그 모든 것은 관찰되어 확인되기 전까지 확정된 게 아니다.
매일 같은 운동을 반복하며 답이 아닌 진실을 찾는다.
그렇게 쓰여진 진실이 관찰되고 확인되며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 자장가, 윤성희
... 이모는 엄마에게 내가 천장에 처음으로 낙서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후로 다른 아이들도 천장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고. 엄마가 고개를 꺾고 내 이름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그 애 꿈을 꾸고 싶어서 나는 잠을 자. 어떤 날은 종일 자기도 해. 그런데도 한 번도 꿈속에 나오질 않아. 그게 무서워." 엄마가 우는 모습을 정면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엄마와 나는 즐거운 때는 같이 웃었지만 슬플 때는 서로 모른 척했다. 위로를 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가끔 상처를 받기도 했다. 엄마도 나에게 상처를 받았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엄마의 슬픔을 알아차린 적이 거의 없었다. 엄마는 들키지 않았으니까. 나는 엄마가 실컷 울 수 있도록 가게 밖으로 나왔다. ... (p115)
... 나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엄마를 닮았네요." 할머니는 지금 엄마보다 더 젊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할머니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딸을 닮았네요." 그러면서 할머니는 엄마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나는 엄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중에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어줄게. 그러면 엄마는 또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되어줘." 그렇게 속삭였더니 할머니는 사라지고 내가 할머니가 되었다. 나는 내 무릎을 베고 누운 엄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무릎을 베고 누우면 나 아주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머리칼을 넘겨줘요. 나는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엄마가 자면서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내일 나는 세발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는 엄마의 꿈을 꿀 것이다. 모래와 모레를 헷갈리고 불가사리와 불가사의를 헷갈리는 아이, 그때마다 삼촌은 엄마에게 꿀밤을 먹일 것이다. 아프지 않게, 살살. 엄마는 근사한 연애를 하고, 다정하면서도 책임감 강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무리 화가 나도 방문을 걸어 잠그지 않는 딸을 낳을 것이다. 그 딸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 재수를 할 것이고, 엄마는 갑자기 살이 쪄서 탁구를 배우러 다닐 것이고, 로또복권 3등에 두 번이나 당첨될 것이다. 그 돈으로 예순 살이 되면 세계 일주를 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매일 밤 내 무릎을 베고 잠든 엄마에게 자장가를 불러줄 것이다. 내가 아주 어릴 적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p126~127)
윤성희 작가님 글에는 죽음이 자주 나온다. 쌍둥이 언니라든가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는 물론 지금처럼 딸이 죽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게 조금 당황스러웠다. 전쟁 소설도 아니고 뭘 이렇게 꾸준히 보내시는 걸까... ;;; 싶었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수천 수만이 죽는 '은하영웅전설'을 읽는다고 해서 죽음이 익숙해지는 건 아니다.
중1때 키르히아이스가 죽는 장면을 보고 눈물이 찔끔났고, 그 이후로 가급적 그 장면만 건너 뛰고 읽는 건 그래서다.
그런데 윤성희 작가님 글을 읽으면 죽음이라는 것이 익숙해진다기 보다는 조금은 범상한 무엇이 된다.
슬프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가급적이면 살려서 쓰시지 굳이 죽이실 거 까지야, 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죽음이라는 게 아주 특별한 것만은 아닌, 우리는 원래 다 죽는 다는 걸, 그게 너무 사실이라 우리가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일깨워준다. 우린 원래 죽는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도, 나도, 모두가.
태어나 사는 것 만큼이나 죽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특별할 것 같지만 사실은 범상한 일임을 일깨워주고
그 범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물들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윤성희 작가님의 소설은 특별한 이야기가 되어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감동도 되는 그런 소설이 된다.
아니, 그런 이야기를 쓰셨으니 구조적으로는 역순인가... 아무튼 그렇다.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읽었었는데, 좋은 글은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나도 반갑고 즐겁다.
- 웨더링, 은희경
이틀 뒤 출장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의 그들은 누가 보기에도 연인 같았다. 그때에는 화성과 금성 사이에 지구라는 현실 세계가 끼어 있다는 게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인선이 부서를 옮겨가며 사내 연애라는 난관을 뚫어보려고 한 데 비해 그의 속도와 주기는 너무 느렸다. 두 사람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맞은편 노인의 말처럼 사람은 결국 시간의 풍화를 이겨내지 못한다. 인선은 처음으로 기차에 탄 것을 후회했다. (p161~162)
책을 읽는 중 작품 속에 나오는 구스타브 홀스트의 '행성'을 찾아 듣고 싶었지만
동네 뒷산을 걸어 산스장 '랫 풀 다운' 운동 기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동안 읽느라 음악을 듣지 못했다.
도착해 여러번 당기는 운동을 반복하기 위해 무게를 가볍게 맞추고 가급적 많은 수 반복해 바(bar)를 당겨댔다.
그리고 짧은 휴식 동안 나는 다시 책을 들었다. 더럽게 재밌네, 라고 생각해버렸으니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당기고 쉬는 동안 읽고 또 당기고 쉬는 동안 읽고.
소설은 짧고 운동도 짧고 챕터로 읽고 횟수로 당기고 시간의 풍화 안에서 그 짧음이 내게는 충분하다.
그것조차 조금씩 버거워지겠지 생각하면 조금 슬퍼지지만 명왕성의 퇴출처럼 어쩔 수 없겠지, 한다.
벌써 낮술이 무리인 나이가 되었다. 날씨가 아무리 딱 좋은 날이 되더라도.
- 초록 스웨터, 편혜영
내친김에 이모에게 아란 무늬 뜨기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몇 번이고 이모 도움을 받고 나서야 조금 손에 익은 느낌이 들었다. 힘을 주고 바늘을 놀리는 내게 이모가 잘 못 뜨는 걸 겁내지 말라고 했다. 틀리면 다시 뜨면 되고 잘못되면 풀어버리면 된다면서. (p194)
불현듯 이모에게 내가 느낀 상실감을 말하고 싶어졌다. 그동안 내게 "시간이 흐르면"하고 시작하는 말을 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말은 하지 않는 사람보다 기어이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나도 그 말에 의지했지만 그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시간은 그냥 흘러갈 뿐이고 망므은 여전했다. 뜨개바늘을 든 채 머뭇거리고 있자 이모가 하다보면 나아진다고 웃으며 말해주었다.
... 이모는 행운이 있을 거라며 동전을 다시 내게 쥐어주었다.
나는 오래되어 표면이 매끄러워진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이 동전들을 오래 간직하게 될 거 같았다. 내게 오백만 원은 없지만 어쩌면 백만 원일지 모르는 동전 네 개와 언제나 십구만 팔천 원이 든 지갑이 있다는 걸 잊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직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엄마가 뜨다 만 스웨터도 있고 엄마의 노래가 담겼을지 모를 테이프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엄마가 내게 슬픔만 남겨두고 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엄마의 손을 마주 잡았을 때의 느낌을 기억했다. 삶에 냉담해질 이유가 많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그 기억 때문이었다.
영주 이모가 갑자기 생각난 듯 현관에 서서 비타민을 챙겨 먹고 우리에게도 한 알씩 주었다. 곧 영주 이모가 "가자"하고 말했고 나주 이모가 "다음에 또 와"하고 말하며 내 손을 꼭 잡았다. (p195~197)
삶에 냉담해지지 않기 위해서 그 정도의 온기로도 충분하다는 걸
삶에 냉담해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차고 넘치는 나 역시 느낀다.
그래서인지 삶이 아닌 사람에 냉담해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두고 설명하고 주의를 주지만 계속 그 선을 넘는다면
복잡계에서 그나마 간신히 유지되는 내 삶의 온기를 지키기 위해
사람에게 냉담해지는 게 그나마 지불해야 할 마음의 비용이 적은 게 요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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