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프롤로그: 한국을 다시 생각한다
1부 한국의 과거
한국의 이념: 세상에, 홍익인간이라니
한국의 신화: 단군신화를 생각한다
한국의 고대: 삼국시대라뇨
한국의 고전: 역사책을 다시 읽는다
한국의 국가: 전염병과 국가
한국의 임금: 왕의 두 신체
한국의 불교: 역사 속의 불교
한국의 정치공동체: 성군은 없다
한국의 보편과 특수: 천주당에 가서 그림을 보다
한국의 유사종교: 유교랜드
한국의 노비: 노비랜드
한국의 독립운동: 미시적 독립투쟁을 찾아서
한국의 식민 체험: 침탈, 동화, 정체성
한국의 정치신학: 님의 침묵
2부 한국의 현재
한국의 군사정권: 〈서울의 봄〉과 쿠데타
한국의 민주주의: 소년이 온다
한국의 혁명: 혁명을 끝내는 법
한국의 시민사회: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찾아서
한국의 근대화: 이것이 한국의 근대화다
한국의 대학: 자유의 궤적
한국의 청년: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한국의 어른: 환멸에 맞서는 안티테제
한국의 이민: 테세우스의 배는 어디에
한국의 사진: 한국 주제의 전시에 가다
한국의 건축: 자유의 여신상을 보다
3부 한국의 미래
한국의 소원: 누군가의 소원을 본다는 것은
한국의 기회: 어떤 행동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개혁: 지금과 다른 삶이 합리적이라 느껴질 때
한국의 선택지: 주어진 선택지에 갇히지 말기를 기원한다
한국의 새 이름: 그것은 구성된 것이다
한국의 기적: 기적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보수: 〈그랜 토리노〉를 권한다
한국의 멸망: 공동체의 생멸을 생각한다
에필로그: 고통을 사랑하십니까
유교랜드 (p9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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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지역에 진입하자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표어가 보였다. 2006년에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브랜드를 안동시가 특허청에 등록하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정신문화의 수도"란 역사적 의의가 담긴 표현이다. 관직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선비들이 모여 살던 고장이라면, 정치적 수도인 한양에 경쟁할 수 있는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말을 붙여볼 만도 하지 않은가. 많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팻말을 거쳐 마침내 유교랜드에 도착했다. 입장객을 맞는 간체자 중국어 안내를 보며, 예상 고객의 상당수가 중국인 관광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유교랜드 내부는 일정한 순서를 따라 관람하게끔 되어 있다. 제일 처음 마주하게 되는 장면은, 오토바이를 옆에 두고 청소년 마네킹들이 서 있는 모습이다. 그들 옆에는 "14세 미만 소년범 5배로 급증"이라는 글이 붙어 있다. 즉 유교랜드의 세계는 도덕이 땅에 떨어진 난세를 개탄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조금 더 걸어가면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란고 묻는 형광 글씨가 나타난다. 이어서 청녀들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혼란스러운(?) 세태 묘사가 나온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인가"라는 형광 글씨가 나타난다. 이어서... 이 사진들은 모두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의 어두운 단면을 나타낸다.
유교랜드는 절망하지 않는다. "유고, 그 아름다운 세상을 찾아서"라고 쓴 형광 글씨가 나탄나다. 마침내 대안을 제시한다. "왜 하필 이익을 논하십니까(何必曰利)?"라는 맹자의 말이 적혀 있다. 탐욕의 제거,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라는 윤리적 실천을 통해 세계의 여러 부정적인 모습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실제로 작동했던 과거 사회는 단순히 그러한 도덕률의 선양과 탐욕의 절제로만 유지되지는 않았지만, 소위 유교의 의의를 연구하는 많은 현대 학자는 현대의 제반 문제를 그런 도덕률로 해결할 수 있다는 취지의 논문을 발표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적 메시지는 과거의 사상과 문화의 실제를 닮았다기보다는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도덕적 조언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상당수 현대 지식인들을 닮았다.
한 층 더 올라가면, 영상 상영관이 나온다. 상영물의 제목은 "인의와 예지의 도깨비 나라"다. 지금은 상영 시간이 아니라기에 직원에게 영상물의 줄거리만 물어보았다. 어른 말을 안 들으면 도깨비가 아이를 호내주는 스토리라고, 직원이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과거 안동 지역에 유행했던 주자학이라는 사상 체계는 결과로 주어지는 보상 때문에 도덕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건만, 이 영상물은 결국 보상 체계를 통해 아이들에게 도덕을 주입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점에서 주자학보다는 보상을 통해 행동을 유도하려는 현대의 많은 논의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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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층으로 내려오니, 휴식하는 입장객들을 위한 서가가 있었다. 각종 위인전, 역사책 등과 함께 <왜 당신의 시계는 멈춰버렸을까?, <반기문 총장님처럼 되고 싶어요>, <아내가 결혼했다>, <부부? 살어 말어>, <한국형 가치투자 전략>과 같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때서야 작은 깨달음이 왔다. 그렇군, 유교랜드는 과거의 한국 문화를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현대 한국을 보여주는 곳이군. 프랑스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 있다고 말한 적이 있지. 유교랜드는 실제의 나라, 실제의 한국 전체가 유교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안동에 있는 것이 아닐까. 꼭 과거에 존재했던 문화라기보다는 현대 한국이 발명한 '유교'의 랜드.
유교랜드에는 중국인 관광객을 유치해야 하는 한구 광광산업의 현실과 지역경제를 활성화해야 하는 지방자치체의 현황과 결국 도덕률로 환윈되고 마는 정치적 비전과 젊은 세대에 대한 얄팍한 이해와 계층 이동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과 조악하게 재발명되고 있는 전통의 모급과 이익을 논하고 있는 한국 투자자들의 마음과 거대한 투자처처럼 된 현대 한국의 모습이 모두 전시되어 있다. 유교랜드는 과거 유교 문화의 테마파크가 아니라 현대 한국을 구현한 테마파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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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이 맛있다. 이즈음의 세대에게 뭐랄까,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어떤 태도, 그러므로 결국 문장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어떤 공통점 같은 게 있는데, 내가 뭘 아는 게 많은 인간이 아니라 일단은 '유머 감각'이라고 표현하겠다. 근데 적고보니 또 그런데 이게 거꾸로랄까, 이런 유머 감각을 가진,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태도를 자신의 문장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보면 그런 사람들이 대체로 그즈음 세대에 모여있더란 말이다.
언뜻 든 생각이지만 초기 개콘(개그콘서트)의 감수성이랄까? 그 글쓴이의 나이가 어떻든 그 당시 그 시대의 감수성의 세례를 받았달까? 그걸 문학쪽에서 보면 가장 잘 사용하는 게 박민규 작가라는 생각이고 칼럼니스트쪽에서는 생각보다 제법 많았는데, 당장 떠오르는 대표적인 사람이 없는 걸 보니 내가 요즘 언론을 얼마나 멀리하고 있는지 자각이 된다. ;;;
아무튼 '유교랜드'에 이어지는 연타(다음 칼럼)도 참 재밌는데, 책을 다 옮겨 적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연타란 결국 후속타를 쳤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앞선에 먼저 친 것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 어쩔 수 없이 앞에 것을 먼저 소개한다. 재밌다. 18,800원. 10퍼 할인을 받겠지만 체감으로는 그 몇 배의 값어치를 아주 오래도록 해줄 거 같다. 물론 약간의 건망증? 같은 게 필요하겠지만.
소년이 온다 (p142~149)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는 일은 피에 젖은 텍스트를 업고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 <소녀이 온다>를 한달음에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다지 길지 않은 이 장편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종종 쉬고, 자주 한숨을 쉬어야 한다. <소년이 온다>는 한국현대사가 낳은 구상도(九相圖)이기 때문이다. 구상도란 인간의 시체가 어떻게 부패하는지를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라고 권하는 그림 장르다. 시체가 즐비했던 1980년 5우러 광주를 다루는 <소년이 온다> 역시 불가피하게 시체에 대한 묘사를 담는다. "그녀는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의 자그마한 여자였는데, 썩어가면서 이제는 성인 남자만큼 몸피가 커졌다. (···) 너는 부패의 속도에 놀란다."(11쪽)
전통적인 구상도가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박에 없다는 보편적 사실을 전한다면, <소년이 온다>는 죽지 않아도 되었을 인간이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한다. "여자의 이마부터 왼쪽 눈과 광대뼈와 턱, 맨살이 드러난 왼쪽 가슴과 옆구리에는 수차례 대검으로 그은 자상이 있다. 곤봉으로 맞은 듯한 오른쪽 두개골은 움푹 함몰돼 뇌수가 보인다. 눈에 띄는 그 상처들이 가장 먼저 썩었다. 타박상을 입은 상처의 피멍들이 뒤따라 부패했다."(12쪽) 독자가 지켜봐야 하는 것은 죽지 말아야 했을 이들의 시체다. 그러니 힘겹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이처럼 힘겨운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소년이 온다>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독재자의 폭정을 비판하고 민주화 과정의 피해자들을 옹호하려는 것일까. 책을 끝까지 읽은이라면 거의 누구나 당시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와 희생자들에 대한 슬픔에 휩싸이게 된지만, <소년이 온다>는 단순히 피해자를 찬양하거나 위로하는 소설이 아니다. 찬양과 위로에 앞서 <소년이 온다>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데 주력하고, 그렇게 전해진 목소리의 내용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공감을 구하는 정서적 호소일 뿐 아니라 사유를 촉발하는 지적인 질문이다.
최근 인터뷰에서 한강은 말했다. "어느 시기에든 골몰하는 질문이 있고, 그 질문을 진척시켜보는 방식으로 소설을 쓰게 됩니다." 그렇다. <소년이 온다> 역시 골몰하는 질문들로 가득 차 있다.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그 불가해한 상황을 두고, 작가는 묻고, 묻고, 또 묻는다. 거듭거듭 묻는다. "왜 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52쪽) 이 질문은 반복된다.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58쪽)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들은 악마였나. 이 질문은 결국 인간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134쪽)
잔인한 가해자는 무력한 피해자를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134쪽)로 만들어버리고 싶어 한다. 잘난 처가지 마라. 인권? 잘난 척하지 마라. 존엄? 잘난 척하지 마라. 너희는 결국 쓰레기다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상대가 자신처럼 비천해지기를 바라는 이들은 상대를 서슴없이 고문한다. 싹싹 빌 때까지 고문한다. "살려주시오. 헐떡이며 남자가 외쳤따. 경련하던 남자의 발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곤봉을 내리쳤다."(25쪽) 왜 이토록 잔인해지는가. 그들은 누군가 존엄을 지키는 모습을 참지 못한다. 그들의 존엄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이 드러나게 되니까.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아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119쪽)
이러니 5.18을 직잔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도리 없이 묻게 된다.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134쪽) 만약 여기서 멈추어 섰다면 <소년이 온다>는 인간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그쳤을 것이다. 인간의 잔악함을 고발하는 선언에 불과할 뿐, 인간읜 심연을 탐구하는 질문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잔인한 가해자들만큼이나 선한 피해자들이 있었기에 한강은 멈추어 서지 않는다.
5.18의 시민들은 수동적인 피해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도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는 체험을 한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114쪽)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116쪽)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같은 인간의 탈을 썼기에, 이제 인간은 단순한 선도 아니고 단순한 악도 아닌, 그야말로 모순을 품은 질문이 된다. 인간은 실로 양면적이며 모순적이다.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이었다. (···)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206, 212쪽) 어떤 특정한 경험이나 편견으로 인해 인간을 일방적으로 찬양하거나 증오하기는 쉽다. 그러나 모순으로 가득 찬 그 존재의 전모를 끌어안기는 쉽지 않다. 인간이란 저열하기도 하고 고귀하기도 한 존재, 아니 저열해질 수도 있고 고귀해질 수도 있는 존재. 그러니 물을 수밖에.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한강은 인터뷰에서 말했다. "저는 언제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그리고 산다는 게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자꾸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저열함은 놀랍게도 생존의 욕망에서 온다. 살겠다는 의지에서 온다. 인간은 죽음이 두렵다. 그 바닥없고 어두컴컴한 구덩이가 두렵다. "입을 벌리고 몸에 구멍이 뚫린 채, 반투명한 창자를 쏟아내며 숨이 끊어지고 싶지 않았다.(89쪽) 그리하여 "쇠가 몸을 뚫으면 사람이 쓰러진다"(115쪽)는 사실에 집착한다. 그래서 총칼을 피하고, 먹을 것을 입에 쑤셔 놓고, 자기 것을 챙기고, 자기 새끼를 감싸고, 재산 증식에 골몰한다. 살아 있는 그 누구도 이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삶이란 실로 지긋지긋한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135쪽)
그러나 인간은 그저 생존에 연연하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인간은 한갓 생존을 넘어서려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게 넘어서게 하는 고귀한 힘을 한강은 양심 혹은 영혼이라고 부른다. 영혼이 고개를 들 때 "결국 그 앳된 학생들의 스크럼 속으로 걸어들어갔을 것이다. 가능한 한 끝가지 그 속에서 버텼을 것이다. 혼자 살아남을 것을 가장 두려워했을 것이다."(87쪽) 그토록 생존에 연연하던 존재가 문득 혼자 살아남을 것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지키는 일로 남은 인생을 흘려보내지 않았을 거란 말이야."(162쪽) 이 견결한 영혼이란 것은 동시에 너무나도 가냘픈 존재. 그래서 묻는다.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130쪽) 영혼은 유리 같은 것이기에 깨지기 쉽고, 깨지기 쉽기에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는 것. 영혼이 깨지는 순간조차 그것은 영혼의 부재 증명이 아니라 존재 증명이다. 약하지만 투명한 무엇인가가 기어이 존재했다는 증거. 인간이 짐승에 불과하지 않았다는 증거.
인간이 이토록 모순적 존재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을 그저 악마로만 보거나 그저 천사로만 보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96쪽)되는 법이기에, 인간의 집단적 삶의 형식과 배치에 대한 사회과학적 고민이 필요하다. 똑같은 사람도 그 형식과 배치에 따라 악마가 될 수도 천사가 될 수도 있기에. 그리고 그 어떤 사회적 배치 속에서도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나가야 한다."(96쪽) <소년이 온다>가 바로 그러한 인문학적질문을 던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인지 끝내 확실히 알 수는 없겠지만, 한강은 인간에게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만큼은 포기하지 않는다.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이마에 들어와 박힐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의 마지막 부분, 죽은 동호의 어린 시절을 엄마는 이렇게 회상한다. "여덟살 묵었을 때 네가 그랬는디. 난 여름은 싫지만 여름밤이 좋아."(191쪽) 그렇게 말한 동호에게 나는 이렇게 화답해본다. "난 인간은 싫지만 이간의 영혼이 좋아." 영혼은 밤처럼 서늘한 것이니까. 여름밤이 없으면 여름을 견딜 수 없고, 영혼이 없으면 인간을 견딜 수 없으니까.
- 글이 아프다. 눈과 코끝이 시큰거린다.
내가 <소년이 온다>를 읽은 건 무척 더운 여름날 한낮의 집구석 골방 안이었다. 창을 전부 열어뒀지만 미풍도 없고 선풍기 하나가 몇 날 며칠째 전기에게 엉덩이를 맡긴 채 끊이없이 노동에 노동, 중노동을 하며 더운 바람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말 그대로 온몸으로 울었다. 눈물 대신 땀이기는 하지만 내 몸에서 세상 밖으로 쏟아낸 물의 양으로만 치자면 말 그대로 온몸으로 울며 읽은 소설이랄 수 있다는 얘기다.
눈물 대신 땀만 그렇게 쏟아냈던 건 더위에 쪄가며 책을 읽은 탓보다는 읽는 내내 화만 났기 때문이었다. 책에서도, 책 밖에서도 화를 내야 할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여전히 살아 헛소리를 내뱉는 전두환부터 폭식 투쟁을 한다는 모지리들에 그걸 응원한다고 피자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온 느끼한 아저씨들, 저게 여론이라는 국회의원들과 그들을 쫓아다니는 언론. 세상에는 없어져야 할 것들, 다른 무엇도 아닌 고통으로 사그러져야 할 것들 투성이었다. 나는 분노했고, 그 분노는 여전하며, 앞으로 그 어떤 맑은 영혼이 내 앞에 오더라도 그 분노는 씻기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분노한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은 변하는 듯 하다 또 조금도 변하지 않을 철옹성처럼 보이다 또 변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차피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모순된다면 그 필터를 통해 인식될 세상 역시 모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정도로 생각하고는 과학책을 꾸준히 읽고 있다. 모순이라는 답 없는 세계에 그나마 네들은 명확한 답을 주겠거니, 읽으며 양자역학의 세계를 접하고 아... 젠장할, 과학이라고 별반다르지 않구나. 참 이 바닥이나 그 바닥이나 개떡같기가 지나치게 찰떡이다, 싶은 찰떡처럼 개떡이 달라붙은 상황.
본인이 인식하는 세계가 개떡같다하여 멍멍이 짓는 소리를 뭘 이렇게 길게 늘어놓나 스스로가 의아한데, 그건 이런 글이 그만큼이나 많이 고맙기 때문이다. 나는 정당한 분노가 있다고 믿지만, 분노는 그 무엇보다 앞서 분노한 사람의 눈을 가린다. 아무리 정당한 분노로 행하는 정의라도 누군가에게 그 분노는 폭력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분노에 눈이 가린 채라면 그 폭력에 놀라 영혼으로 저항하는 사람에게 정의는 사라지고 분노만 남아 끝까지 폭력을 쏟아낼 지 모를 일이다.
이 글이 <소년이 온다>를 읽고 활활 타오르는 분노에 더 가열찬 분노 에너지만 섭취하고 만 나에게, 어이 아저씨 그러지 마시라고 얘길해주고 있다. 마치 영약 섭취 설명서처럼 친절하게 설명해주면서. 무협지를 보면 영약이더라도 복용 방법이 잘못되면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는데, 이 설명서를 들고 다시 한 번 <소년이 온다>를 읽어봐야겠다.
자유의 궤적 (p175~182)
1980년 서울대 신입생이었던 어떤 이는 그해 봄을 잊을 수 없다.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꽃들이 자지러지듯 피어난 어느 봄날, 교정에 탱크가 진주했다. 꽃들이 소스라치듯 피어난 어느 봄날, 기숙사로 군인들이 난입했다. 퍽! 군인들은 욕설과 고함을 지르며 학생들을 구타했고, 학생들은 쫓기듯 기숙사 복도에 집합했다. ...
이렇게 대학 시절을 시작한 세대에게 자유의 의미는 분명했다. 이 야만스러운 군부독재로부터의 자유. 일주일이 멀다 하고 데모가 이어졌고, 그러한 정치적 저항은 1987년 직선제르 수용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군부독재로부터의 자율는 그 활활 타오르는 명분 속에서 다양한 자유가 시도되었다. 독재에 저항할 자유, 대안적인 사회를 꿈꿀 자유, 법질서를 무시할 자유, 밤거리에서 방뇨할 자유,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될 자유. 그 시대에는 공부에 집중하지 않아도 될 명분이 널려 있었다. ...
세월은 흘렀고, 민주화는 이루어졌고, 경제는 성장했으며, 1980년 신입생이었던 그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지금은 어느 대학의 고위 보직자가 된 그가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언 1994년 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대학신문에 "살아 있는 정신에게-자유인의 표상에 부쳐"라는 글을 기고한다. 그 글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군의 입학이 유독 축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이을까." 이렇게 신입생에게 찬물을 끼얹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른바 명문 대학에 입학해서 기쁨과 자부심에 차 있을 학생들에게. 이 대학 입학은 너희의 성취가 아니라고 일갈한다. "우연히도 군은 밥술이나 먹는 집에서 태어났고 그 때문에 고액의 과외 또는 재수도 할 수 있었고 혹은 튼튼한 육질과 맑은 귀를 유지할 수 있지 않았던가. 밥은 잘 먹었느냐, 잘 잤느냐, 내복 입었느냐, 공부했느냐고 묻는 보살핌 속에 군이 놓여 있지 않았을까." 즉 잘 먹고 잘 사는 집안에 우연히 태어난 결과로, 이른바 명문 대학에 입학한 것이니 무엇이 그리 자랑스러울 게 있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당당히 명문 대학에 입학한 영재들이 아니라고? 이게 우리의 자랑스러운 성취가 아니라고? 이렇게 반문할 법한 신입생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교 시절 내내 인내를 거듭했을 이라면 응당 보일 만한 반응이다. 그런데 김윤식은 그들을 한마디로 이렇게 규정한다. 돼지. 너희는 돼지다. 왜 돼지인가? 김윤식은 명문대 신입생을 두고 왜 돼지라고 불렀는가? 대학 입학은 그들의 성취도 아니었을뿐더라 심지어 그들의 '선택'도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르는 강아지조차도 군의 안색을 살피는 그런 속에서 군은 살았다. 무슨 대학을 가야 된다든가, 무엇을 전공해야 된다는 것도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갈데없는 돼지였다."
자신의 인생행로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존재라. 그런 존재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김윤식은 그러한 학생들을 노예라고 불렀다. 김윤식이 보기에, 그들을 노예로 만든 이들은 다름 아닌 그들의 '아비 어미'였다. "군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아마도 사랑이라는 위선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리라." 그들은 사랑이라는 위선의 이름으로 신입생들이 처한 진정한 존재 조건을 가려주었떤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존재 조건이란? "군은 다만 태어나졌을 따름. 던져진 존재였떤 것. 어디에 던져졌던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 아니겠는가. 거기 군은 혼자 던져졌고 따라서 불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혼자 있음, 불안, 무서움, 이 삼각형의 도식이 군의 본래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존재 조건을 신입생들은 계속 외면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대학은 자유를 추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학에 온 이상 학생들은 수험서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을 또렷이 응시하는 텍스트를 읽을 것이라고, 김윤식은 믿었다. "그 계기란 도처에서 예감처럼 온다. 군이 창공의 별을 응시할 때 온다. 헤겔을 읽을 때 온다. <무진기행>을 읽을 때 온다. 릴케를 읽을 때 온다." 그렇게 읽고 읽다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고독한 자신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김윤식은 단언한다. "이 짐은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
"혼자 있음으로 말미암아 감당해야 될 불안과 공포를 대가로 하여 비로소 얻어진 권리." 김윤식은 자유를 이렇게 규정했다. 이제 더 이상 군부독재와 같은 절대다수가 합의하는 명징한 악은 없다. 그 악에 저항하는 것만으로 자유가 되는 시대는 저물었다. 이제 너는 혼자다. 자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렇게 김윤식은 말한 것이다. 그런데 고독과 공포로 물든 이 자유야말로 축복할 일이다. 대학 입학이 축복할 일이라면, 그건 바로 대학이 자유를 추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윤식은 이렇게 글을 맺는다. "'살아 있는 정신'이라 부르는 이 자유 앞에 군은 지금 서 있다. 군의 입학이 축복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장면에서이리라."
...
김윤식이 저 글을 쓴 지도 약 30년이 지났다. ... 그 30년 동안 대학은 착실하게 길을 잃었다. 누군가를 짐짓 경멸하는 사람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지적, 도덕적 권위가 사라졌다. 한때 대학의 권위를 수호했던 수문장들은 그 세월 동안 노골적인 도덕적 타락, 과도한 출세욕, 퇴색한 감수성, 망실된 총기, 깊어진 우울증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그리하여 마침내 대학은 완전히 길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제 대학은 진리를 추구하기에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길을 잃었기에 자유로울 것이다. 거기에 입학한 신입생들도 자유로울 것이다. 지나치게 자유로울 것이다. 비문과 비약으로 가득 찬 주장을 해도 고쳐주는 사람이 드물기에 자유로울 것이다. 만만치 않은 숙제로 괴롭히는 사람이 드물기에 자유로울 것이다. ...
대학인 이제 자유와 진리의 전당이기 이전에 산학협동의 전당이다. 학생들은 존재의 고독에서 오는 공포와 싸우기보다는 취직의 공포와 싸운다. 공포에 질린 포유류가 되어 앞다투어 취직이 용이한 곳, 학점이 수월한 곳으로 몰려간다. ... 이 세상을 만든 것은 그르이 아니다. 기분에 의해 타인을 비방하고, 배척하고, 혐오하며, 명예를 거래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은 중요하다. 모든 활동에는 경제적 기초가 있어야 하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취직과 돈벌이에 유념하는 것은 타당하고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을 자유라고 부를 수는 없다. ...
- 원래 세 개로 나뉘어진 부에서 각 하나 정도의 칼럼만 발췌를 할 생각이었다. 그것도 부분만. 그래야 전체가 더 궁금해질 테니까. 발췌나마 조금 더 많은 이들에게 그렇게 내용이 전해지고, 그렇게 읽혀진 부분 때문에 내 의도대로 책 전체가 궁금해진다면, 내가 기쁘게 읽은 이 책이 더 많이 잃히고 판매되고 뭐 그런 망상의 일부를 이렇게 실현해보자는...
근데 도무지... 책 전체를 스캔해 인터넷 상에 공개해버리고 싶은 욕구를 버티기가 어렵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그러하므로, 참아야 한다, 지적재산권 침해로 아무리 나라에서 정성스럽게 지어준 밥이라고 해도 그들과 같으 밥에 반찬을 두고 겸상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따위의 헛소리를 씨부렁 거리며 허벅지를 찔러댔다. 그럼에도... 도무지 참지 못하고, 사실 몇 번의 고비를 어떻게든 넘겼었는데 이 부분에서는 도저히 참지를 못했다. 따흑
7세 고시니 4세 고시 따위의 소리를 들으며 내가 느끼는 고통이 이렇게나 큰 것이었구나, 이렇게 자각한다. 그렇게 엘리트가 되는 사람들이 제일 앞장서 가장 알차게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나라를 들어먹고 해쳐먹고 조져먹는 다는 걸 무수히 보며 받은 스트레스가 정말 컸었구나, 또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하필 오늘이 4월 4일 그날이라니... ㅎ
그리고 그럼으로 이렇게 이 책의 발췌는 갈음한다. '한국의 미래'에서 '그것은 구성된 것이다' '기적이란 무엇인가' '<그랜 토리노>를 권한다' 셋 중 뭘 적어 올리는 게 좋을까, 고민에 고민에 고민을 하다, 내가 작가도 아닌데 왜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는 '그것은 구성된 것이다'에서 배운 아주 작은 부분인데, 역시 배워야 몸이 덜 고생한다. 역시나,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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