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치백Hunchback, 이치카와 사오 / 양윤옥
목 한가운데 구멍을 뚫으면 원리적으로 콧구멍으로 호흡하는 것보다 부하가 떨어진다고 열네 살의 내게 병동 주치의는 설명해주었다. 그 이후로 인공호흡기가 필요한 것은 반듯하게 누운 자세일 때뿐이다. "미오튜뷸러 미오퍼시는 진행성이 아니니까 괜찮아"라는 게 부모님의 '구두선 口頭禪'이었다. 이 단어는 국어사전에 '그럴싸하게 자꾸 얘기할 뿐 내용이나 실속이 없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어쨌거나 유전자 에러로 근육의 설계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서 극적인 진행이 없다고 해봤자 유지도 성장도 노화도 비장애인과 똑같이는 되지 않는다. (p21)
임신과 중절을 해보고 싶다.
내 휘어진 몸속에서 태아는 제대로 크지도 못할 텐데.
출산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육아도 어렵다.
하지만 아마도 임신과 중절까지라면 보통 사람처럼 가능할 것이다. 생식기능에는 문제가 없으니까.
그래서 임신과 중절은 해보고 싶다.
평범한 여자 사람처럼 아이를 임신하고 중절해 보는 게 나의 꿈입니다. (p27~28)
두께가 3, 4센티미터나 되는 책을 양손으로 잡고 집중해야 하는 독서는 다른 어떤 행위보다 등뼈에 부하가 많이 걸리는 일이다. 나는 종이책을 증오한다. '눈이 보이고, 책을 들 수 있고, 책장을 넘길 수 있고, 독서 자세를 유지할 수 있고, 서점에 자유롭게 사러 다닐 수 있어야 한다'라는 다섯 가지의 건강성을 요구하는 독서 문화의 마치스모(machismo. 남자다움. 남성 우월주의. '남자다운 남자'를 뜻하는 스페인어 '마초'에서 유래)를 증오한다. 그 특권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른바 '서책 애호가'들의 무지한 오만함을 증오한다. 구부러진 목으로 겨우겨우 지탱하는 무거운 머리가 두통으로 삐거덕거리고, 내장을 짓누르며 휘어진 허리가 앞으로 기운 자세 탓에 지구와의 줄다리기에 자꾸만 지고 만다. 종이책을 읽을 때마다 내 등뼈는 부쩍 더 휘어지는 것만 같다. 내 등뼈가 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교실 책상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항상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같은 교실의 친구들 3분의 1쯤은 노트에 눈을 붙이고 등을 웅크린 이상한 자세로 칠판 글씨를 받아썼다. 그런데도 대학 병원 재활과에서 아저씨들에 둘러싸여 벌거숭이가 된 몸에 석고붕대가 둘둘 감긴 것은 나였다. 자세가 좋지 않은 건강한 아이들의 등뼈는 눈곱만큼도 휘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올바른 설계도가 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집을 소유한 경우가 거의 없고, 있더라도 건축업자의 아이 정도뿐인 동네였다. 맑은 하늘을 전투기 소리가 뒤덮어 버리는, 이름을 빼앗긴 채 미군과 자위대 기지가 된 도시. 금색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이, 돌고래 피어싱을 달고 다니던 아이, 나에게 사이비 교주의 말씀 책을 건네준 아이, 그 친구들이 그리 좋은 인생에 도달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등뼈가 휘어지지 않는 올바른 설계도에 준하는 인생을 보내고 있다는 건 틀림이 없다. 잘못 인쇄된 설계도밖에 참조할 수 없는 나는 어떻게 해야 그 친구들처럼 될 수 있을까. 그 친구들 정도의 수준이 된다. 아기가 생기고, 지우고, 헤어지고, 다시 합체하고, 생기고, 낳고, 헤어지고, 다시 합체하고, 낳고 ··· 그런 인생의 흉내만이라도 좋다. (p37~39)
"응, 응응, 잇, 앗, 아앗, 아앗, 아앙···"
고령의 처녀 중증 장애인이 쓴 의미 없는 철자가 화면 너머 여성 독자의 '꿀단지'를 벌름거리게 해준 덕분에 돈이 돌아가는 에코 시스템.
돈이 있고 건강이 없으면 매우 정결한 인생이 됩니다.
트위터에 올리지 않은 초안들이 에버노트를 가득 채우고 있다. 좀 더 진지한 논조로 바꿔 <디스어빌리티&퀴어 스터디> 과목의 포럼에 문제를 제기하려다가 그것도 관둬버렸다. <장애 여성의 리프로덕티브 헬스&인권> 강의에서 들었던 문제들은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장애인 시설이나 근육위축증 병동에서 버젓이 토용되는 이성 간병인, 그리고 그들에 의한 성적 학대도, 시각장애 여성이 임신한 아이를 포기하도록 부모나 의사가 추천했다는 사례도, 휠체어를 탄 여성이 지하철에서 치한을 피해 도망치지 못했다는 사례도 내 실제 인생과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였다. 비장애 여성과 장애 여성이 평행선을 달리듯이 장애 여성과 열반에 든 샤카 또한 평행선을 달리는 것 같다. 겹칠 듯하면서도 겹쳐지지 않는다. 부모님과 돈의 보호를 받아온 나는 부자유한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사회에 나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도, 피부도, 점막도 타자와의 마찰을 경험한 적이 없다.
정결한 인생을 자학하는 대신에 쏟아낸, 얼핏 떠오른 희망사항이 마음에 들어서 고정 트윗으로 쓰고 있다.
다시 태어난다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
돈으로 마찰에서 멀어진 여자에서, 마찰로 돈을 버는 여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p50~51)
... 1996년에는 마침내 장애인도 아이를 낳는 측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법이 정해졌지만, 생식 기술의 발전과 생활 필수품화에 따라 장애인 살해는 결국 수많은 커플에게 캐주얼한 것이 되었다. 머지않아 비용도 저렴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죽이기 위해 잉태하려고 하는 장애인이 있어도 괜찮은 거 아닌가?
그걸로 겨우 균형이 잡히잖아.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기는 심적인 고뇌를 <모나리자> 그림에 던졌던 요네즈 도모코의 심정 그 자체와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모나리자>를 더럽히고 싶어지는 이유는 있다. 박물관이든 도서관이든 보존되는 역사적 건조물이 나는 싫다. 완성된 모습으로 그곳에 계속 존재하는 오래된 것이 싫다. 파괴되지 않고 남아서 낡아가는 데 가치가 있는 것들이 싫은 것이다. 살아갈수록 내 몸은 비뚤어지고 파괴되어 간다. 죽음을 향해 파괴되어 가는 게 아니다. 살기 위해 파괴되고 살아낸 시간의 증거로서 파괴되어 간다. 그런 점이 비장애인이 걸리는 위중한 불치병과는 결정적으로 다르고, 다소의 시간 차가 있을 뿐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파괴되어 가는 비장애인의 노화와도 다르다.
책을 읽을 때마다 등뼈는 구부러져 폐를 짓누르고, 목에는 구멍이 뚫렸고, 걸어다니면 여기저기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내 몸은 살아가기 위해 파괴되어 왔다.
살아가기 위해 싹트는 생명을 죽이는 것과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 (p60~61)
나를 돈으로만 보는 자에 대해서는 나도 돈을 통해서만 볼 뿐이다.
사회란 게 원래 그렇잖아.
그래서 6일 동안 점잖게 기다렸다가 나는 다나카 씨에게 말했다.
"얼마를 원해요?"
서론 없이도 커뮤니케이션은 정확히 성립되었다. 왜냐면 우리는 둘 다 약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여태까지 다나카 씨를 약자 남성이라는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자칭으로도 충분했다. 썰렁하기 짝이 없는 장조의 대화 따위, 연주할 재능이 없는 우리는 단조로, 아니 쇤베르크의 불협화음처럼 틀을 벗어나 진짜 속내를 얘기할 수 있었다. 무조적無調的으로.
그 증거로 다나카 씨는 무슨 얘기냐고 의아해하는 등의 어긋난 템포를 연출하지 않았다.
"1억 엔."
다나카 씨는 말했다.
귀여운 금액에 코 안쪽이 웃고 싶어서 근질거렸다. 내가 사후의 사용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는 액수는 그보다 훨씬 더 크다.
"1억 5,500만 엔은 어때요?"
목을 누르고 나는 말했다.
"다나카 씨의 키만큼이에요. 1센티미터당 100만 엔. 당신의 비장애인 몸에 가격을 매긴 거예요."
'증여세로 반절을 떼어 가더라도 반올림하면 1억'이라고 하지 못할 것도 없는 금액이다. 그 숨은 뜻을 이해했다고 쳐도 아마 악의 쪽이 더 인상에 남았을 것이다.
다나카 씨가 경멸의 형태로 눈을 가늘게 뜬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자라면 야마노우치 씨도 갖고 있잖아요. 아, 비장애인의 정자가 아니면 싫습니까?"
제법 아픈 곳을 찔렀다.
단순한 비아냥치고는 장애 여성이 가진 콤플렉스의 본질을 건드리는 질문이었다. (p74~76)
나는 책임질 수 없다. 다운그레이드된 내 근력으로는 책임질 수 없다.
스사키 씨가 방에 들어와 물었다.
"샤카 씨, 점심은 일어나서 먹을 수 있어?"
'네, 먹을 수 있어요.'
미오튜뷸러 미오퍼시는 몸을 쓰지 않으면 금세 근력이 약해져서 나중에 훈련하려고 해도 전혀 회복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올라 다니던 계단도 이제는 올라갈 수 없고, 화장실에 손잡이를 설치했더니 1년여 만에 손잡이 없이는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열반의 샤카는 죽을 둥 살 둥 침대에서 일어나고 매일매일 아무리 숨 쉬기가 힘들어도 밤이 될 때까지 데스크에 앉아서 버틴다. 종이책을 증오하면서도 종이책에 달라붙어 끝가지 읽는다.
벽 너머 옆방 입주자가 메마른 소리로 손뼉을 쳤다. 나와 비슷한 근 질환으로 자리보전 중인 옆방 여성은 침대 위 이동식 변기에 볼일을 보면 주방 근처에서 대기 중인 간병인에게 손뼉으로 신호를 보내 뒤처리를 부탁한다. 세상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며 말할 것이다. "나라면 절대 못 견뎌. 나라면 죽음을 선택할 거야."라고.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것이다. 옆방의 그녀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에야말로 인간의 존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참된 열반이 거기에 있다.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p93~94)
- 늘 뭔가를 안다는 착각을 뭔가를 알아가며 깨우친다.
샤카는 위악적이지도 위선적이지도 않은,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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