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고

2026 올해의 문제소설

살아남자 2026. 5. 16. 22:49

 

 

목차

■ 책머리에

 

강석희│선과 부피의 사랑
[작품 해설] 독서와 기도, 애도 주체의 수행과 고통의 장소성 _ 하신애

김멜라│아무래짜
[작품 해설] 불안하면 어때?! _ 심진경

서장원│히데오
[작품 해설] 빛의 파편에 대하여 _ 이소영

성혜령│대부호
[작품 해설] 혁명은 조금 늦게 도착한다 _ 허민

손보미│우리 엄마는 남미새
[작품 해설] 허약하고 빛나는 소설의 진실 _ 이희우

심윤경│우리는
[작품 해설] 우리의 취약함을 예찬하라 _ 김은하

이미상│일일야성(一日野性)
[작품 해설] 안전한 야성(野性)은 없다 _ 최은혜

임솔아│금빛 베드 러너
[작품 해설] 모르는 것을 이불처럼 덮고 _ 안서현

임현│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작품 해설] 희망에 대항하는 희망, 그 낙관하지 않는 희망에 대하여 _ 조윤정

조해진│영원의 하루
[작품 해설] 영원하지 않은 하루를 위한 비명 _ 홍덕구

최은미│김춘영
[작품 해설] 침묵이 말하기 시작하는 자리 _ 임세화

 

 

 

 

선과 부피의 사랑, 강석희

 

오길 잘했다.

선주가 말했다. 재영은 김밥에 성게알을 올려 선주의 입에 넣어주었다. 선주는 그것을 받아먹으며 거북이를 계속 봤다. 재영은 문득 소원 하나를 취소하고 다른 소원을 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주의 소원들 중에서 하나는 완벽하게 이뤄주세요. 재영이 거북이가 있던 자리를 보았으나 바위는 텅 비어 있었다.

갔나?

재영은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있어.

선주가 다시 거북이를 찾았다. 재영은 얼른 마지막 소원을 빌었다.

 

선주가 영도에서 빌었던 소원이 무엇인지 재영은 알지 못했으나 한 가지는 확실히 이루어졌다. 그러니 재영의 소원 하나도 이루어진 셈이었다. (p25)

 

 

여행의 첫 행선지는 두오모 성당이었다.

무조건 꼭대기까지 갔다 오는 거야. 알지?

호텔을 나서면서 선주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생에도 다시 만나게 된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두 사람도 알고 있었다.

그때는 좀 다른 방식으로 만나볼까?

재영이 말했다. 선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눈이 부시도록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더니 굵은 빗방울이 들었다. 건물 쪽으로 최대한 붙어서 걸었지만 비를 긋기에는 무리여서 머리며 어깨가 축축하게 젖었다. 양팔에 우산과 우의를 주렁주렁 든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선주가 앞장서서 걸으며 쏘리, 노 땡큐, 말하며 세 명쯤 지나쳤지만 비는 갈수록 굵어졌다.

항복하자. 항복.

재영이 선주에게 외쳤다. 선주가 가까이 있던 흑인 남자에게 나이키 로고가 그려진 카키색 판초우의를 샀다. 남자는 잇츠 나이키, 잇츠 리얼, 하며 한 장에 15유로를 불렀다. 선주는 두 장에 20유로로 하자 했고 결국 22유로에 합의를 봤다. 포장 비닐을 벗겨보니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튼튼해 보였다.

나이키에서 우의도 만드나?

재영이 조금 감탄하는 투로 말했다.

이거 진품은 아닌 거 같은데.

선주가 로고를 문지르며 말했다.

여행 왔으면 바가지도 쓰고 그러는 거지.

재영이 우의를 뒤집어쓴 다음 모자의 각을 잡았다. 선주는 그 말이 근사하다고 생각했고 재영을 따라 우의를 입었따. 머리 위로 빗방울이 통통 소리를 냈다. (p26~27)

 

- 분명 맛과 향이 좋은 차... 근데 내 입에는 조금 연하게 타진 거 같은...

 

 

 

아무래짜, 김멜라

 

... 신조는 빗소리를, 배송이는 개수대의 하수 소리를. 그때 소리에 화음을 넣듯 시소의 가운데 받침점에서 밀푀유 냄비가 끓었다. 의자에 앉은 신조가

  "어, 어."

하고 소리 냈고, 양손에 고무장갑을 낀 배송이가 한쪽 발을 번쩍 들었다. 흡사 감춰둔 무공을 막 드러낸 주방장처럼 배송이가 가스레인지의 레버를 발가락으로 돌려 불을 껐다. 놀란 신조가 차고 향긋한 귤껍질을 움켜쥐었다. 배송이가 자랑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봤어? 나 엄청 빠르지!"

  풍, 하고 마음의 빗장 하나가 걸쇠에서 떨어지는 소리. 신조는 배송이를 수상하게 바라봤다.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렇게······"

  귀여워, 라는 말이 나오려다 혀끝으로 가라앉고, 대단해, 라는 단어가 맴돌다 목구멍으로 스몄다. 끓는 냄비를 멀거니 보기만 하는 자신을 나무라지도 한심해하지도 않은 채 그저 보드랍게 웃다니. '배송아, 너 그냥 내 언니 할래? 내가 언니라고 부를까?' 신조는 싫다고 함부로 끊어낼 수 없는 혈육의 끈으로 배송이를 친친 동여매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 섣부른 소망이 배송이를 아프게 했다고 제멋대로 망상했다. 배송이의 쓸개 속 돌은 나 때문이라고, 내가 욕실 청소 당번을 미뤄서, 내가 막창과 마라 맛에 빠진 너를 내버려둬서 이 불행을 막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넘치는 냄비를 보며 어, 어 하듯 신조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책망을 이어갔다. 한밤에 배송이가 통증으로 허리를 뒤틀 때마다 신조는 자기가 만든 허깨비로 도망쳤다. (p45~46)

 

 

  천우는 침실로 들어가 이부자리에 해정을 눕혔다. 침대에 걸터앉아 사선으로 달린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주자 해정이 몸을 동그랗게 꼬부리며 천우의 넓적다리를 끌어안았다. 천우는 아이를 어르듯 해정의 등을 다독이다 팬티 안으로 파고들어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따.

  "더러워······"

  "그게 좋아."

  천우는 해정의 볼기를 아프지 않게 꼬집고서 머리에 베개를 받쳐주었다. 연애할 때도 천우는 해정의 살집과 병아리처럼 보얀 뺨이 좋았다. 정확히 짚자면 그 몸피를 만들어낸 해정의 먹성에 설렜고 꼼짝없이 반했다. 그다지 호사스러울 게 없는 메뉴인데도 해정은 아이처럼 감탄사를 내뱉거나 기름 묻은 손끝을 자연스레 입술로 가져갔다. 때때로 볼이 미어지게 음식을 입에 넣고서 신이 나 어깨춤을 출 때면 천우는 심장이 몇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듯했다. 그렇게 꾸밈없이 행동하는 게 마치 자신을 향한 믿음의 증거인 양 가슴이 환하게 아렸따. 이 사람과 있으면 나도 달라질 수 있을까. 한번은 둘이 메밀국수를 먹으러 갔다가 천우가 상사에게 온 전화를 받으러 밖으러 나갔다. 돌아오니 해정이 음식을 먹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수는 냉육수에 면일 불어 젓가락으로 집어지지도 않았다. 천우는 숟가락으로 면을 퍼 먹으며 생각했다. 앞으로 메밀국수는 못 먹겠구나. 이제 나는 메밀이란 글자만 봐도 가슴이 울렁울렁하겠구나. 천우는 해정에게 청혼하며 대단치 않은 다짐은 꺼냈다. 네가 귀가할 땐 내가 문 앞에 서서 언제나 너의 가방을 받아주겠다고, 헤어질 땐 네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갑작스레 비가 올 땐 우산을 들고 널 마중 나가겠다고. 해정은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길목에 서서 자기를 기다려달라고 했다. 천우는 어릴 적 자신이 부모에게 바라던 것을 해정에게 해주었다. 간혹 해정과 부딪힐 땐 젓가락을 들고 개수대 앞에 서서 흐르는 물을 벴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을 흉내 내는 거였다. 연극이라도 진짜 칼을 쥐고 몰지각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천우는 여전히 한밤에 깨어나 칼날이 틀립없이 칼집에 꽂혀 있나 확인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자라게 한 것은 보고 배운 어른의 모습이 아닌 혼자 무수히 그려보던 꿈이었다. 천우는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고루한 말을 진심으로 새겼다. 해정과 한 몸이 되어 그녀의 눈으로 자신으 보면 그렇게 되비친 자화상은 조금 덜 미울지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p53~54)

 

 

... 신조는 차라리 자신이 대신 아팠으면 싶었다. 통째로는 아니고 절반 정도, 아니 삼 분의 일 정도만. 깨문 입술 사이로 기도가 흘러나왔다. 부처님은 왠지 이런 데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다른 쪽 신들의 이름을 줄 세웠다. '하느님, 예수님, 성모 마리아님, 저도 동정녀예요.저한테 옮겨주세요,제 친구의 아픔을 덜어 저한테 얹어주세요.아무래짜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배송이가 혀를 길게 내빼며 헛구역질했다. 신조는 엉거주춤 서서 배송이가 와락 토를 해버리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 와중에 구급차의 침대를 염려하고 구급대원의 눈치를 살폈다. 그 산만한 마음결에서 신조는 아프게 깨달았다. 알량한 체면보다 못한 자기 감수성의 한계를. 누구도 다른 몸을 대신해 육체의 짐을 덜어줄 수 없음을. 먹거나 싸기처럼 앓기 또한 여지없이 일인용이란 것을. 신조는 주머니에서 찹찹이를 한 장 꺼내 찢듯이 비틀었다. 좁은 차 안에 배송이의 신음이 가득 찼다. 신조도 겁결에 숨이 뚝뚝 멎었다. 숨 쉴 자격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23:05. 시간은 고이고 썩다 못해 구급차의 배기가스로 휘발되는 듯했다. 영원은 이런 식으로 오는구나. 무한은 이렇게도 가능하구나. 일 초 일 초를 남김없이 헤아리며, 줄에 꿰인 자수정을 밀어 올리듯, 초와 분을 떠밀면서, 밤새, 아침이 올때까지,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구급차도 이대로 묶여 있는 건가. 다른 응급환자가 있으면 어쩌지. 23:05. 신조는 퍼뜩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이렇게 계쏙 시간을 보다간 자신이 먼저 혼절해버릴 것 같았다. 배송이의 손을 잡듯 침대 난간을 붙잡았다. 아플 때 손잡아줄 수 있는 사이. 배송아, 응급실에 있는 사람들 부럽다. 그치? 약이랑 알코올 냄새 무지 달콤하겠다. 그치? 한 명이라도 나가줬으면 좋겠다. 그치? 살아서 나가든 죽어서 나가든 제발 한 명만 떠나줘. (p62~63)

 

 

  차고 단단한 나무판에 뺨을 대고 천우는 젖은 흙내음을 맡았다. 소란한 물소리를 따라 천우의 생각이 흘러갔다. 노루귀와 망초, 측백과 꽃대들, 포석 위에 투둑투둑. 토해지지 않는 슬픔, 감자튀김, 강아지풀의 다른 말은 버들강아지, 짧고 서운한 생애, 나는 아이를 낳지 않을 테다, 절대로 사는 고통을 주지 않을 테다, 어릴 적 결심, 살 자격과 죽을 권리, 밥 짓기, 헤매는 사람들, 사경을, 거리를, 알록달록한 기쁨을, 거짓말 마라, 속이지 마라, 모든 아이는 태어나고 싶어 하는데, 저 비처럼, 내리고 적시고 흐르고 싶어 할 텐데. (p72)

 

- 아 재밌네... 아 슬프네... 아무래짜, 결국엔 좋네.

 

 

 

히데오, 서장원

 

  나는 그때도 히데오가 나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히데오는 나를 좋아했지만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그의 감정이 달라질 가능성도 거의 없을 것 같았다. 다만 한 주에 두 번씩, 팀원 전원이 참석하는 대본 연습이 끝나면 히데오는 정해진 순서처럼 나에게 함께 걷기를 청했고, 걷는 동안엔 그때껏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들을 내게 들려주곤 했다. 한국의 초등학교로 온 뒤 얼마나 열심히 한국어 발음을 연습했는지, 일본인 아버지에 대해 어떤 거짓말들을 지어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어찌나 피곤했는지.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나도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는 마음이 됐다. 돌이켜봐도 그 대화에는 분명 지나치게 내밀한 구석이 있었다. 히데오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마주했던 여러 일들도 들려주곤 했다. 학창 시절 내내,  역시 시간이나 국어 시간에 들려오던 일본에 대한 말들, 혐오와 경멸로 범벅이 된 그 말들을 히데오는 모두 기억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런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히데오는 한국인 어머니를 모욕하며 자신을 괴롭히던 어린이들과 교내 일본어 강사를 쪽바리라고 부르던 고등학생들이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고 말하면서도 그 일을 똑같이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도 인종차별이 맞지. 아니면 그걸 뭐라고 해?"

  나는 석연치 않은 마음으로 대꾸했따. 한국인이 일본인을 혐오하는 일, "쪽바리"니 "섬숭이"니 하는 말들은 당연히 인종차별이 맞겠지만 한국인이 일본과 일본인을 싫어하는 걸 그저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생각하면 마음이 좀 복잡해졌다. 히데오 역시 그런 점을 모르지 않았다.

  "한국이랑 일본 사이엔 과거가 있잖아."

  히데오의 이야기는 늘 그렇게 끝났고, 그러면 우리는 연극이나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곤 했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과거가 있고 그것은 전혀 청산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죄를 히데오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고등학교 일어 교사가 공공연하게 쪽바리란 말을 들었던 것은 인종차별이고 제노포비아라고 말이다. 물론 지금의 히데오에게는 그런 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겠지만. (p94~95)

 

- 아주 깔끔.

 

 

 

대부호, 성혜령

 

 

 

우리 엄마는 남미새, 손보미

 

  나는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 러브 스토리. 요즘도 이런 단어를 쓰는 살마이 있나? 러브 스토리, 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통 속으로 팔 전체를 쑥 집어넣었다가 끈적거리는 질감에 몸서리치며 팔을 빼내는 일, 덕지덕지 팔에 묻은 이물질을 곧바로 씻어냈겠지만, 잠들기 전 문득 발견되는(미처 제거하지 못한) 말라붙은 흔적들. 그 흔적으로 인해 아찔할 정도로 생생하게 재생되는 감각, 미끈거리고 질척거리며 소용돌이치는. (p140)

 

 

와 (p149, 오타 ㅋ)

 

 

  "유별나게 굴지 좀 마라. 누굴 닮아서 그러는지, 원."

  이 말을 들었을 때, 새삼스레 이해한 건, 어머니가 평범하지 않은 일(다른 어머니들은 저대 하지 않을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그런 어머니의 딸이라는 점이었다. 내가 하는 '유별난' 선택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게서 삐져나온 꼬리표의 항목을 굵은 글씨로 확대하는 결과밖에 초래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신념은 사치였다. 분수에 맞지 않았다. 이게 당시 나의 결론이었다. 그런 결론에 이르는 게 어렵거나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았다. 체념이나 굴복 같은 느낌을 자아내지도 않았다(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머니 집에서 고기 없이 차려진 밥상을 보았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아무 말도 없이 밥을 먹는 나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너의 신념을 존중해."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진심으로, 마음속 깊이."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갑자기, 마음속을 끝도 없이 부유하던, 미처 이름을 붙이지 못한 알갱이들이 맹렬하게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 섬광 같은 쓰라림, 그러니까, 내가 아주 중요한 걸 헌신짝같이 던져버렸다는 자각. 체념이나 굴복 같은 감정을 느꼈어야 마땅했으리라는 감각. 하지만 이런 쓰라림은 그다음 찾아오는 경박하고 어리숙한 속임수로 손쉽게 덮어버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집에서는 나의 신념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는 것처럼 굴 수 있었으니까. 그 집에서 만큼은 나는 여전히 내게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고마워." (p158~159)

 

- 손보미 작가님 글 중, 죄송하게도, 처음으로 재밌다고 느낀 거 같다. 분명 그 전에도 그런 게 있었겠지만, 꽤 오래 전이라(이겠지? ;;;) 다시 읽지 않는 한 기억 나지는 않을 거 같고, 내 취향 상 작가님 글을 읽는 경우는 내가 찾아 읽는 게 아니라 이렇게 신작이 새 책에 다른 글들과 함께 실려 커쇼의 폭포수 커브 마냥 스트라이크 존 끝에 걸쳐서 들어오는 게 아니라면 없을 듯 하니, 아마도 작가님 글 중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글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싶다. 지금까지. 그리고 아무튼 현재까지는 '아무래짜'보다 더 재밌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심윤경

 

 ...

  "병수야 , 지금 어디야."

  "몰라."

  전화기의 반대쪽 끝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전화를 왜 안 받었어."

  "전화기를 보호자가 가지고 있어."

  "보호자? 보호자가 누군데?"

  "몰라."

  다시 한번 아득했다.

  "전화를 바꿔줘. 보호자한테 전화를 바꿔줘봐."

  "보호자, 안 받아."

  병수는 금방이라도 다시 사라질 듯 위태로웠다. 생과 사의 가름이 예있으매, 지금 병수를 잡아야 한다. 지금 놓치면 다시 잡을 수 없는 마지막 연락인 것을, 성훈은 경험과 직관으로 깨달았다. 그런데 모른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는 병수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그걸 알 수가 없었다. 성훈은 눈앞에서 희뜩희뜩 보이다 말다 하는 얇은 실을 어떻게든 잡으려 애썼다.

  "애들, 애들은 연락이 되나?"

  "재승이가 주말에 와."

  "아들 연락처가 어떻게 돼?"

  "몰라."

  병수의 휴대폰에는 아들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겠지만, 그것을 성훈에게 보내줄 능력은 지금 병수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볼에 닿은 휴대폰이 더 따뜻해졌다. 성훈은 애타는 심정으로 휴대폰만 더 힘주어 움켜쥐었다. 병수에게 닿기 위해 그가 짜낼 수 있는 생각들은, 이제 더 이상 남지 않았다.

  "성훈아, 나 산보하고 싶다."

  "그래, 병수야. 산보 시켜줄게."

  "보호자가 바빠. 산보하고 싶다."

  "그래, 병수야. 산보하자. 조금만 있어. 우리가 갈게."

  거기까지 하고 전화는 끊어졌다. 병수가 어디 있는지 묻는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오지 않았다. 성훈은 딸이 가져다놓은 된장죽이 식도록 멀거니 바라보며 병수가 지금 어떤 상태일지 생각했다.

  노인에게 어느 날 일어나는 흔한 일일 뿐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비틀비틀하게라도 매주 목요일 일호집에 나타나던 병수는, 어느 날 아침 더 이상 걷기 힘들어진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병수의 자식들은 의논한 끝에 병수를 요양원에 보내었을 것이다. 병수가 말하는 '보호자'는 아마도 간병인일 것이다. 간병인이 병수의 휴대폰을 맡아두었을 것이다. 병수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받지 않고, 가끔식 그의 손에 휴대폰을 쥐어줄 것이다. 병수의 가물가물한 정신에 기적적으로 성훈에게 연락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스쳤을 것이다. 그렇게 닿은 병수의 전화가 우주의 숨결이거나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기적 같디고 하고 덧없기도 했다. (p205~206)

 

 

  늙어서 서럽다는 게 그런 거였다. 젊어서는 이런 일들이 없었으니까. 그들은 유능했고 억세었고 끈기 있게 자식들을 키웠다.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인생의 복무려니 여겼다. 그런데 그들의 생애 중간에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 계약이 부당하게 중도해지되고 새로운 규약이 선포되었다. 자식들은 그들이 자녀를 키운 방식이 우악스러웠고 무엇 하나 공평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저희들도 손자 손녀를 볼 나이에 이르도록 아직도 부모를 원망하는 게 말이 되나, 성훈은 그것이 정말이지 눈이 둥그래지도록 놀라웠다. 그들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라곤 없었어도 부모를 원망하는 법은 알지도 못하고 살았던 세대였다. (p210)

 

- 나도 엄마한테 잔소리하는데... ㅜㅜ

 

 

 

일일야성, 이미상

 

  부부 사이인 운주와 경수는 마흔세 살이었고 그 나이는 이십칠 세가 그러하듯 의미심장했다. 늙음을 일찍 뒤집어쓰고 싶어지는 나이. 스물일곱 살 때 운주는 서른 살이라고 하고 다녔고, 오늘날 경수는 병원에서 전립선 질환을 앓는 오륙십 대들 사이에 끼어 자신도 '내일모레면 오십'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늙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미리 늙어버려 노화의 공포를 잊으려는 것이다. 제일 먼저 몽둥이에 엉덩이를 대는 겁에 질린 아이처럼. (p228)

 

- ㄷㄷㄷ 몰랐는데 껌 좀 씹으셨.... ;;;;

 

 

 

금빛 베드 러너 , 임솔아

 

  검사자와 달리, 상담사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진단이 남용되는 것을 비판했다. 지윤의 경우, 그저 수줍음이 많아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걸 어려워하는 것일 뿐이라 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아니라고 못박았다. 말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했다.

  "어떤 점에서요?"

  지윤은 상담사에게 질문했다.

  "제 말의 어떤 점이 비자폐인의 특징인 건지 저로서는 잘 몰라서요."

  상담사가 대답했다.

  "친구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할 때 타인의 감정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셨어요. 걔들은 타인의 감정을 못 느껴요. 관심도 없고요. 많이 봐서 알아요."

  지윤은 온몸이 굳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상담사의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 속에서 '걔들'이라는 표현이 튀어나오는 순간, 지윤은 자신이 개구리 떼에게 쫓기는 개처럼 느껴졌다. 오로지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개의 몸짓이 떠올랐다. 자폐인이 타인의 감정을 못 느낀다는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자폐인이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고 요약하는 모습에서 이 상담사는 적어도 자폐인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판단했다. 잘 알지 못한다고. 자신의 무지에서 묻어나오는 미량의 악의가 어떤 식으로 지윤에게 가닿는지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느껴져도 무시하고 있다고.

  "제 검사자는 평생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연구한 분이에요."

  "저도 이 일을 이십오 년 넘게 했어요."

  상담사가 임상심리전문가 자격증과 임상심리사 1급 자격증, 상담심리사 1급 자격증을 갖고 있다는 건 지윤도 알았다. 세 가지 자격증을 모두 가진 사람이 한국에 그닥 많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검사자가 공부를 미국에서 했다고 했나요?"

  상담사가 물었다.

  "영국이요."

  "지윤 씨, 여기가 영국은 아니잖아요."

  그는 진심으로 지윤을 돕고 싶어했다. 지윤을 비자폐인으로 바라보는 것이 상담사에게는 지윤에 대한 선의였다. '걔들'이 아닌 '우리'의 카테고리에 넣어주는 것. 지윤은 기시감이 들었다. 언제가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칠 년 전쯤. 친구는 지윤에게 물었다. 너라면 우리처럼 남자를 만날 수 있지 않아? 친구는 안타까워하면서, 동시에 지윤에게 소소감을 주면서, 칭찬의 의미를 담아 그런 말을 했다.

  ...

  지윤은 검사자에게 보냈던 자신의 편지를 떠올렸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결과를 받아들고 지윤은 검사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지윤은 검사 결과지를 다 읽고 나서 용서를 받는 기분이었다. 매일같이 느껴왔던 고립감, 소중한 사람들에게 받았던 상처들, 소중해지기도 전에 관계에서 미리 제외돼버렸던 경험들. 타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남몰래 품어온 두려움들. 평생 동안 무겁게 등에 업고 살아온 죄책감이 등에서 내려와 지윤을 바라보는 듯했다. 지윤은 비로소 등에 업힌 무거운 것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메일에다 적었던 안도감은 얼마 가지 않아 서서히 다른 형태로 변해갔다. 앞으로 지윤은 어떤 사람으로 타인들 앞에 있게 될까. 사람들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지윤의 뒤에서 말할 것이다. 자폐래. 지윤은 늘 자신의 몸이 지나치게 커다랗다고 느껴왔다. 몸 안에 갇혀 있는 지윤은 탁구공처럼 자그마하고 바빴다. 걸음을 걸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처럼 걸으라고, 자그마한 지윤은 발끝에서부터 팔 끝까지 부산스레 돌아다니며 교정하고 감시하고 지시하고 격려했다. 시커먼 동굴 같은 자신의 몸속을 끝없이 헤매 다녔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소리치면 몸속 구석구석으로부터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지윤이 살면서 자주 느껴온 교감은 고작 그 메아리가 전부였다.

  상담사의 재검사 제안이 지윤에겐 선택지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자폐 스펙트럼의 범줄 들어갈지, 범주를 거부할지. 내키는 대로 하면 되었다. (p268~270)

 

 

  지윤 천장을 올려다본다. 지금 엄마가 보고 있을 천장이 지윤은 궁금하다. 엄마가 혹시 지금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지는 않을까. 천장에 가까워지고 있지는 않을까. 이곳에 누워 있으면서 이곳저곳을 날아다니고 있지는 않을까. 이곳에 누워 있으면서 이곳저곳을 날아다니고 있지는 않을까. 식탁에 앉아 빵을 먹고 있는 남자를 지나 텔레비전을 켜둔 채 안락의자에 잠든 할머니 옆을 맴돌고 있는 건 아닐까. 연잎을 탄 개구리들이 지금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을까. 우린 그걸 못 보고 있는 걸까. 혹시 엄마의 눈에만 보이는 건 아닐까. 엄마는 많이 두려울까. 어느 만큼일까. 지윤은 자신이 타인을 외롭게 만든다고 늘 생각했다. 지윤은 타인이 부지불식간에 표현해온 많은 메시지들을 자주 놓친다고 생각했다. 무얼 놓치는지에 마음이 쏠려서 누군가와 무언가를 하고 있어도 누구와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늘 한 박자 늦게 실감했다.

  기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옆에 있는 엄마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들키지 않고 싶어서다. 지윤이 혼자서 몰래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엄마에게도 지윤에게도 더 낫다. ... (p271)

 

 

  지윤은 오래 연습해서 가장 익숙한 표정 하나를 꺼낸다. 입꼬리를 올리고 치아를 드러내며 엄마에게 미소를 보인다.

  "우리 지윤이는 웃는 표정이 참 이쁘다."

  엄마는 알 수 없는 표정을 또 짓고 있다. 앞으로도 지윤은 엄마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놓칠 것이다. 지윤은 알고 싶다는 마음이 짙어질수록 모르는 것들로 휩싸였다. 지윤은 희고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엄마의 어깨 위로 끌어당겨준다. 모르는 것들을 이불처럼 덮고서 지윤은 엄마의 기침 소리를 듣고 있다. 조금씩 잦아드는 소리. 미세하게 들썩이는 엄마의 몸은 이 기침에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 룸서비스를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해둔다. 엄마에게 아침을 먹이고, 렉라자 세 알을 먹이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야지. 지윤은 미리 다짐한다. 먼 길을 운전하며 엄마의 집으로 갈 때에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을 아주 약하게 틀거나 틀지 않아야 한다고. 그걸 잊으면 안 된다고. 내일 저녁에는 엄마의 집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볼 것이다. 엄마는 여행 프로그램을 틀어놓을 것이다. 엄마가 결코 직접 볼 리 없는 곳들을 함께 바라볼 것이다. (p274)

 

- 좁은 세상을 넓히는데, 모르는 세계에 발디딜 때, 미지와 조우할 때 책이라서, 소설이라서, 글이라서 참 다행이다 싶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임현


  무엇보다 선호를 위해 내가 했던 노력들은 다 뭐가 되는 겁니까. 선호의 선처를 바라는 의견서였습니다. 그것으로 기회를 주고 싶었거든요. 그러나 무얼 주기보단 오히려 반성과 참회의 기회마저 빼앗아버렸던 건 아니었을까요. 처음부터 더 엄하게 처벌하고 경고해야 했던 걸까요. 그랬다면 아마 그런 나쁜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결과적으로 나의 선처는 오히려 선호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가벼운 기소유예 처분은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게 한 것이 아니라, 더 대담한 범죄를 저지르는 계기가 되어버렸거든요. 그러니까 더 큰 사고가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연쇄적인 단계를 다름 아닌 내가 제공한 셈이었습니다. 단순가담자였던 선호는 이후 더 적극적으로 유사 범죄에 뛰어들었습니다. 고의적으로 차량 사고를 유발하고, 현장에서 합의금을 유도했습니다. 그러다가 기어코 그 사달이 나버린 겁니다. (p296~297)


 - 임현 작가님 글을 많이 읽지는 못했는데, 그래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도 그렇고 '고두'도 그렇고 이런 스타일의 글을 잘 쓰시는 듯. 인간은 복잡계다, 복잡하다.



영원의 하루, 조해진

  그가 돌아간 뒤 도원은 바닥을 청소했고 새정제와 약품 통, 각종 걸레와 바스켓, 고압 분사기를 차례로 제자리에 놓았다. 산호색 시폰 원피스가 다리에 감길 때의 감각이 되살아난 건 고무장화와 젖은 양말을 벗어 탈탈 털고 있을 때였다. 그 첫 만남을 위해 백화점에서 할부로 구매한 옷이었다. 그런 것마저 기억의 서랍 속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워 도원은 짧게 웃었다. 손톱이 말갛던 시절이었다. 손등이 두껍지 않았던 때, 무릎관절에서 소리가 나지 않고 통증도 없던 때, 혀뿌리 너머로 노란 가래가 응고되어 있지도 않았던 때·····. 영도를 소개해준 그 고객이라면 여전히 소식을 알지 못했다. 생김과 이름은 잊혔고 생사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이 영도와 자신의 십구 년에 입김을 불어넣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그 우연의 파장에 압도될 때가 있지만, 후회나 원망은 제거된 헐거운 순간들일 뿐이었다. (p314)

 

 

  ... 도원에게는 내세울 만한 경력이 없었다. 결혼 뒤에도 출퇴근에 네 시간씩 할애하며 계속 은행을 다녔다 한들 창구 담당 계약직의 경력은 취업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을 터였다. 도원에게 남은 밑천은 몸뿐이었다. 아직은 삼십 대였던 그때의 도원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아파트를 지키기 위해, 영도의 약값과 상담 비용을 벌기 위해, 언젠가 태어날지 모를 아이가 파산한 부모를 만나게 하지 않기 위해. (p318)

 

 

  그 밤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온 것일까.
  나아진 건 분명 있었다. 영도는 용접이라는 일에 안착한 듯 보였고 상담을 끊었으며 알약도 줄여가는 중이었다. 아파트는 아직 그들의 것이었고, 빚은 남아 있긴 했지만 제3금융권에는 없었다. 아이는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영도 대신 일하며 비참함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겪어온 도원은 아이가 부재하는 한 아이 몫의 세상도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다행이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려고 도원은 애썼다. 그런 믿음이 모래로 만들어진 성처럼 속절없이 무너지는 날이 또 찾아온다 하더라도 노력해야 한다는 걸, 그래야 살 수 있다는 걸, 적어도 잊은 적은 없었다.


  "퇴근하려고 공장을 막 나서는데 얘가 우는 걸 들었어. 목에 밧줄을 매단 채 여기서 혼자 울고 있더라."
  "······."
  "겨우 구했어."
  "······."

  "얘 하나를 겨우······."
  "······."
  "이름도 지었어. 방금."
  "뭐?"
  "도도, 영원을 빼고 도도."
   도원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영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고 담요로 쏙들어간 돼지를 연신 쓰다듬을 뿐이었다.
   도원은 영도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런 날이 있었다.
  영도와 세 번째 데이트를 했던 날, 나는 은행의 정식 직원이 아니며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대학생 때부터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영도에게 고백한 그날, 영도는 도원을 흘끗 보더니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대꾸했었다. 직장은 둘 중에 한 명이라도 다니면 된다고 했고 누구나 고아가 될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도 했다. 통증과 비슷하게 체감되는 애정도 있다는 걸, 도원은 그때 처음 알았다. 아직 손도 잡지 않았던 때였지만 도원은 그대로 영도에게 안겼고 영도는 어색해하면서도 정성스럽게 도원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어쩌면 도원이 영도를 붙잡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영도를 떠날 수 없으리란 걸 인정할 때마다 도원의 마음 한 켠엔 안도감이 함께 쌓여갔다. 그런 생각도 자주 했다. 영원은 없다 해도, 끔찍한 추락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하루가 연이어진다면 그 연쇄가 어쩌면 영원할 수 있다고, 어떤 하루는 영원처럼 길었으니까.
  도원이 오늘밤은 집에서 돼지를 재우자고 하자 영도의 눈빛이 빛났다.

 ... (p328~329)

- 조해진 작가님이 미국 대통령 하면 안 될까. 그나마 세계가 좀 다시 균형 맞추고 좋아질 거 같은데...
  이따가 삼겹살 구워야 되는데, 죄책감 없이 가능할까... 아... 성공 ;;;



김춘영, 최은미